나는 글씨로도 너를 알고 : 17년 전 한문 수업

by 스마일한문샘

* <장점 열전>과 짝이 되는 글입니다. 17년 전 가을 어느 날 수업 마치고 쓴 글을 다듬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이 1988년생이니 지금은 다들 어른이겠습니다.


수요일 5교시 2학년 0반. 늘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이 다른 날보다는 차분합니다. 누가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ㄱ 어떻게 생각해요?"

"ㄱ은 글씨가 다른 아이들보단 어른스럽지"

"그럼 ㄴ이 글씨는요?"

"ㄴ이 글씨는 약간 삐죽삐죽하지!"

그때부터 술렁술렁.

​​

"ㄷ은요?" "글씨가 크지"

"ㄹ은요?" "단정하고 무난하지"

"ㅁ은요?" "길쭉하고 예쁘장한 글씨체지"

"ㅂ은요?" "시화에 잘 어울리는 글씨지"

"ㅅ은요?" "ㅅ은 약간 사선으로 기울여 쓰지" ("맞아맞아" 하는 아이들)

"ㅇ은요?" "눈에 띄는 특징은 별로 없지만 색깔 펜을 많이 쓰지"

이쯤 되니 아이들이 거의 경악!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ㅈ은요?" "연필 글씨를 많이 쓰지"

"ㅊ은요?" "그때그때 달라. 잘 쓸 때는 잘 쓰고 날려 쓸 때는 날려 쓰고"

(순간, "맞아, 그런 거 같아" 소근거리는 듯한 ㅊ)

"ㅋ은요?" "무던하게 쓰는 편이지. 1학기보단 2학기 글씨가 많이 좋아졌어"

"그럼 ㅌ은요?" "보통 무난한 글씨체지"

"ㅍ은요? ㅍ이 글씨 진짜 못 쓰죠?" "아냐, 1학기보단 좋아지고 있어"

"ㅎ은요?" "(잠시 머뭇거리다) 음.. 대체로 무난한 글씨지"

"샘 혹시 모르는 건 1학기보다 잘 썼다거나 무난하다고 하는 거 아니예요?"라고 하면서도 아이들은 즐거워했습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속내를 풀었습니다.

"학습지 검사를 자주 하다 보니 여러분의 글씨만 봐도 누구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답니다. 물론 100% 다는 모르지만요. 0반에는 특징 있는 글씨를 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A, B 글씨는 'A체' 'B체' 이런 거 만들어도 좋을 정도입니다. C는 저보다 글씨를 더 잘 쓰지요. 여러분의 이름을 알고, 번호와 명렬을 외우고, 글씨를 알아가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지요."

"샘~ 그러면 전교생 이름 다 알아요?"

"다는 모르고 제게 수업 들은 아이들은 압니다. 지금 3학년 여학생들 중 여섯 반은 다 알고, 그때 안 가르친 반은 절반 정도만 안답니다. 재작년에 가르쳤던 졸업생들도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명렬을 외우지요."


"샘, 정말 대단하세요. <세상에 이런 일이> 나가도 되겠어요."

"제가 여러분 이름과 번호를 외우려고 노력하는 건 부산에서 중학생들 가르칠 때 1년 내내 이름 한번 못 외운 아이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는 한문이 1시간이죠? 전교생을 가르치다 보니 1년 내내 끝까지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아이가 꽤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에 오던 날 결심했지요. 최소한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이름은 꼭 외워서 불러 주자고."

마음이 통했을까요. 그날 0반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수업에 집중했습니다. 한두 아이가 속닥속닥 떠들긴 했지만 수업분위기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수업 내내 떠오른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그 수업시간 일을 요약하면 "나는 글씨로도 너를 알고"!!! 솔직히 수업 중 글씨체가 기억나지 않았던 몇몇 아이들에겐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제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그 아이들의 글씨와 그들의 모든 것, 그리고 저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알고 계시니 그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크고 작은 특징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관심과 사랑을 한가득 나누어 주는 선생님이 되어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가장 나다운 것'(꼼꼼함)이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뿌듯했던 수업이었습니다.

*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출애굽기 33:12)

그날 수업일기입니다. 학생들 반과 이름은 모자이크로 가렸습니다. (2005.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