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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LUKE May 16. 2023

너에게로 떠나는 여행

다른 사람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 세계를 여행한다는 것

김영하 작가님의 장편소설 ‘작별인사’를 읽기 시작했다. YES24 도서 리뷰에 작가님의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종종 보였다. 기존 작가님의 책을 좋아했기에 스타일이 많이 바뀌지 않았기를 바랐다. 아직 1/3 정도 읽은 수준이지만 다행히 내가 좋아했던 특유의 필력과 스토리 텔링의 스타일은 남아있었다. 작가님의 책을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나는 그 스타일을 미리 규정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책을 읽다가 실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 다행히 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정체성 상실에서 오는 충격을 줄이려면 자신이 해왔던 특정한 역할이 변화할 때조차 정체성의 중요한 측면들이 유지되도록 자신을 재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군인이야 → 나는 단련되고, 믿을 만하고, 팀에서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제임스 클리어


정체성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존재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주변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러고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실망하곤 한다.


정체성 상실은 나에 대한 규정이 틀어질 때만 올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대방이 내가 규정한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면 괴리감을 느끼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내 경험에 기반해 주요 원인 3가지를 적어보았다.


1. 나의 정체성을 상대방에게도 강요한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의 정체성을 존중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 또한 이러한 존중이 나만의 잣대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러니까 너도 이래야 해!"라는 생각으로 무의식 중에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상대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예시로 한국에서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종종 그러하다. 이런 부모는 자식에게 본인을 투영한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학부모의 지위가 되며, 자식이 어떤 대학을 갔느냐가 모임에서의 위치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들은 엄청난 상실감을 느낀다.


2. 상대방의 일면을 보고 판단한다

상대방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을 것 같다. 나의 경우 앞서 작가님의 스타일을 판단한 것처럼 상대방의 일면을 바라보고 판단해 버린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행동을 보고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특정 집단 또는 특정 역할에서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의 성격을 지레 짐작한다.


3.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부족하다

아쉽게도 학교와 군대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강제로 누군가와 집단을 이루고 오랜 기간 생활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울릴 수 있는 모임만을 찾아다니고, 자신에게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동하는 확증편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사람들은 누구와 만날지 스스로 정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은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처음 봤을 때 맘에 들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경향이 높다. 사람을 판단하는 첫 단계인 첫인상에 대한 분석은 고작 0.1초 만에 정해진다. 그렇기에 틀린 경우가 많다. 첫인상은 상대방과 오랜 기간 지내며, 조금씩 수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간을 견뎌보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첫인상이 마지막 인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우선 그들의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는지, 어떤 학교 생활을 했는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등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일면을 보고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 학업으로 인해 나와 갈등이 심했던 어머니를 대학교 3, 4학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 아빠는 아빠의 세계, 엄마는 엄마의 세계, 너에게는 너만의 세계가 있는 거지. 이 세계는 살아온 시대와 환경, 경험에 따라 달라지거든.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야.


그렇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상대방이 살아온 긴 세월을 한 순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충돌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가보지 않은 나라를 여행한다고 생각한다는 느낌으로 상대방의 세계에 입국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해외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가진 생각이 상대방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여러 번 그리고 오랜 기간 방문하면 기존에 보던 것도 새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여러 번 보고, 오래 봐야 상대방이 말과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관광지부터 조그마한 동네 마을까지 가봐야 그 나라의 문화를 더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마주쳐야 상대방의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 긴 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짧은 여행이 있고 긴 여행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나에게 짧은 여행일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긴 여행일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여행일 것이기에

나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이렇게 다짐한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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