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경 Jun 21. 2024

그대의 존재함에 관하여

고귀한 외침이라는그대의 이름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였다? 불러야만 하는 것이 이름이고, 또 불러주며 부르다가 죽어야 할 주체가 비로소 이름이다.

  제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남이 더 많이 사용하는 것 중에 으뜸이 바로 이름이라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듯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고유한 표상을 대신한다.

  극소수의 아무개나 혹은 누군지는 어쩔 수 없이 익명(匿名)이나 가명 선호하지만 생각해 보자면 이름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은 쓰임새에 따라 평판이나 명예 또는 명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내일이면 곧 잊혀질 이름일 망정 적어도 살아가는 동안 최소 두 번 이상을 만나게 되면, 기억해야 하거나 또는 묻어둬야 할 상징이다.

  그럼에도 본인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의 고귀함을 대체로 망각하며 살아간다. 문장의 표현 중에 이름 모를 들꽃이라는 직관 서술이 있건만, 들꽃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나를 비롯하여 당신만이 모르고 있을 뿐 그들에게도 나름은 그쪽 분야에서 불러주는 학명(이름)이 별도로 있음은 물론이다.


  세상에 보잘것없고 하찮을 망정 이름 없는 존재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품사 중 이름을 의미하는 명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상회한다. 망자란 이름을 상실한 사람이라는 것만 봐도 이름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은 다 잃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허명으로 포장된 명예를 뜻함이 아니다. 그리하여 각 개개인의 이름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이름을 제로 한 영화나 매체가 많지만, 사견으로는 그중에 으뜸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작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아닌가 싶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장인물

  이 애니메이션에서 이름은 극의 플롯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 된다. 여기에서 이름이란 상호 소통의 도구라는 차원을 벗어나 존재의식 그 자체를 의미하며, 무엇보다도 이름의 소중함이 강조된다.

  이름을 차압당한 치히로는 센으로 개명되어 온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고,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하쿠는 마법사의 종노릇으로 살아간다. 마법사 유바바는 쌍둥이 언니 제니바의 이름(도장)을 훔쳐 모략을 꾸미고, 제니바는 치히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하라며 응원한다. 이름을 상실하게 되면 제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구의 엄마나 아빠 또는 누구의 아내 혹은 아줌마나 아저씨 등의 대명사로 불린다는 것은 기억을 탈출한 이름의 그림자 즉, 자아를 상실한 이름의 흔적이다.


   에피소드 도입부 첫머리아래의 클라이맥스 소절은 김춘수 시인 '꽃'을 오마주 하여 차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얼마나 저렴한 욕망이자 고귀 외침인가? 

  나와 그대는 공허한 이름 하나를 지녔다는 사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자백을 해야 한다.


"희수야! 금요일인데 아빠랑 한 잔 하자!"

작가의 이전글 인공지능(AI)의 역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