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책 제목이 낯설어서 한참 망설였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책에서는 어떤 곳을 말하는 걸까?
“그래, 저기 어디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 가서 꼭꼭 숨어야겠네. 누군지 몰라도 카야를 데리고 가서 키워야 되는 사람들 참 안됐다.‘ 테이트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무슨 말이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니?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어.“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들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중략)”
이 책을 쓴 저자는 델리아 오언스.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논픽션으로 엮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녀의 첫 소설로 미국에서는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은 작가에 따라 때로는 아주 낯선 느낌, 혹은 쉽게 읽히기도 하고, 어려워서 매번 쉬었다 가기도 하니 왠만해서는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낯선 느낌이 많이 들었다. 외국 작가인 탓도 있고, 소설의 배경인 ’습지‘의 삶이 잘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이 소설은 1950년부터 70년까지 계속 순간 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난하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탓에 엄마도 집을 나가버리고, 큰언니와 큰오빠도 떠난 집에서 오빠인 조디와 카야 둘만 남아 있었다. 아빠는 돈도 벌지 못하고 집을 나가 술을 먹고 돌아오면 엄마와 아이들을 때리는 무능한 사람이다. 사랑했던 아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서 이 습지에 자리 잡았지만 결국 모든 가족이 다 떠나고 막내인 카야와 둘만 남게 된다.
7살인 카야는 학교에 한 번 갔다가 친구들의 놀림에 놀라고, 자신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고 도망을 다닌다. 습지를 카야만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숨어 있는 카야를 찾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카야는 태어나서 단 하루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가리를 관찰하고 조가비를 모으는 생활만으로도 배움은 충분했다. “나는 벌써 비둘기처럼 우는 법을 아는걸.” 카야는 혼잣말을 했다.
카야는 몇 일만에, 혹은 몇 주만에 한 번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리면서 혼자 살아간다. 7살 아이가 자신이 먹을 것을 챙기고, 결국은 혼자서 삶을 배워간다. 학교도 가지 않고 습지에서 카야는 어떻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을까?
문명과 떨어져서 홀로 지내는 카야가 혼자 살아가는 것은 자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츠를 구하고, 홍합을 따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점핑 아저씨에게 가져다 판다. 점핑 아저씨와 아내인 메이블은 카야에게 유일한 가족같은 존재가 된다. 잠시 카야와 잘 지내며 함께 밥을 먹고, 배도 타고 조금 나아졌던 아빠는 다시 상태가 좋지 않아져 집에 돌아오는 것이 드물어 지더니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온 유일한 편지를 보고 싶었던 카야는 아빠에게 전해줬는데 화가 난 아빠는 편지도 불태우고, 엄마의 모든 물건도 다 태워버렸다. 왜 엄마는 카야에게 돌아오지 않은걸까? 카야는 모든 가족이 떠난 집에서 홀로 습지를 헤매고, 먹을 것을 구하고, 옷이나 신발조차 제대로 된 것을 신을 수 없었지만 점핑아저씨 가족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살아간다.
그러다 카야가 만난 테이트. 조딘 오빠와 알고 지냈던 테이트는 카야에게 조금씩 다가가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옆에 있어준다. 긴 시간 카야가 생물에 대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 탓에 카야는 자신이 본 다양한 생물들을 그리고, 책을 기반으로 글도 쓴다. 카야의 이런 자연과 함께 하는 삶 탓에 카야가 쓴 글이 책으로 나오게 되는 것도 정말 신기하다. 테이트가 옆에 계속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학에 간 테이트는 몇 번 돌아와서 카야를 만나려고 했지만 카야에게서 멀어져 몇 년동안이나 카야를 만나지 않는다. 그렇게 떠난 테이트를 그리워하던 카야는 체이스를 만나고 그와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바람둥이에, 카야를 가지고 나서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테이트는 카야와 함께 있기 위해서 직장과 모든 것들을 카야 주변에 준비한다. 하지만 다시 테이트를 만나기 두려운 카야. 그리고 결혼하면서도 카야를 가지고 싶어하는 체이스. 시간이 1950년대와 60년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체이스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살인범을 찾아가는 과정이 계속 펼쳐진다. 결국 두 시간의 만나는 시점은 체이스의 살인범으로 카야가 체포되면서이다.
카야는 정말 체이스를 죽인걸까? 시간의 흐름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작품은 그렇게 혼란스럽지는 않다. 정말 드물게 인간과 자연의 중간쯤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카야를 보면서 이런 삶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들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카야가 책을 통해 자연을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자신이 보는 아름다운 자연과 책으로 이해하게 된 자연이 만나서 하나를 만들어 낸다. 멋진 그림을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을 쓰는 카야의 책은 잘 팔리고, 카야의 집을 고칠 수 있는 만큼의 돈도 벌게 만든다.
자연 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익혔기에 가능했던 카야의 삶. 결국 테이트와 함께 하게 되는 카야. 체이스를 죽였다고 재판을 받는 과정은 정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감이 넘쳤다. 마지막 결론을 짓는 방법이 조금 아쉬웠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바다 내음과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있었다. 자연 속의 카야의 삶이 일반적인 인간의 삶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조금 아쉬웠다. 그냥 그렇게 살기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돈과 물건, 자연 속에서만 살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작가에게 그런 양보를 하도록 한 것은 아닐까.
조디 오빠가 카야를 찾아와서 다시 만났을 때 카야가 한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가족은 도대체 무엇일까? 엄마가 떠난 후 행복했던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두고 온 것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파하다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카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가 떠난 건 용서해. 하지만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왜 나를 버렸는지. 오빠는 기억 못할지 모르지만, 엄마가 떠나고 나서 나한테 암여우는 배를 곯거나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새끼들을 버리고 간다고 했잖아. 어치파 죽을 운명이니까. 그 새끼들은 죽지만 암여우는 살아서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번식한다고. 성체가 될 때까지 새끼를 키울 수 있게 됐을 때 말이야.
그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와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카야는 예순 여섯에 조용히 심장이 멎었다. 배를 타고 표류한 채로 테이트에게 발견된다. 밑에 있는 이 글귀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카야의 죽음은 사이프러스 나무를 지나간 것이 맞는걸까.
죽음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그 처녀를 사이프러스 나무에 숨기리라.
작가는 이 책을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했다.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카야처럼 습지의 판잣집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많은 사람들과 빌딩속에서 살고 있어도 늘 외롭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테이트가 카야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그곳으로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는 살아있는 우리, 우리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떤 의미일까.
밤이 내리자 테이트는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소에 다다랐을 때는 높은 캐노피 밑에서 발길을 멈추고 습지의 어두운 비원으로 손짓해 부르는 수백 마리의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깊은 곳,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