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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루미 Mar 04. 2022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라

스스로를 바꾸고 싶은 너에게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살 시도를 했던 한 팬에게 쓴 손편지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절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세요. 그건 내 비하인드 신과 그 사람의 하이라이트 신을 비교하는 짓이에요.”     


 이제는 위의 문장을 SNS나 책에서 많이 접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잘 꾸미고 포장해서 올린 사진인 것을 알아도 부러움이 생기고, 나 자신에게는 초라함을 느끼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멈출 수 있을까?     


 6년 전, 내가 스무 살 때 나는 전형적인 SNS의 중독자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들어가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곤 했다. 나는 내가 본 모든 피드에 '좋아요'를 눌렀다. 친구들이 나를 ‘좋아요충’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런 내가 어떻게 SNS를 끊고 남과의 비교를 멈추었는지 궁금한가?     


 2015년 12월, 나는 친구와 수원역에서 놀 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흥을 깨는 전화벨 소리. “아빠가 산 내려오다가 크게 다쳤대. 지금 구로 고려대 병원이라는데 빨리 와. 엄마도 지금 가능 중이야.”라고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와의 통화를 막 끊었을 때는 사실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등산을 즐기던 아버지여서 ‘크게’라는 말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다.


 친구의 “루미야 아버지 다치신 거면 큰일 아니야? 빨리 가보자”라는 말에 고려대 병원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병원을 가는 중 입원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딸~ 살짝 미끄러졌네. 크게 다친 건 아니야.” 웃으며 나를 반겨줄 것 같았다. 병원을 가는 길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디야? 나 지금 지하철 내리고 택시 타고 들어가는 중. 아빠 많이 다친 거 아니지?” 돌아온 엄마의 대답에 심장이 철컹 내려앉았다.     

아빠 돌아가셨어. 병원 도착하면 영안실로 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러웠다. “거짓말하지 마. 이런 걸로 장난치지 마.”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짓말 아니고 정말 아빠 돌아가셨어. 영안실로 와.”라는 엄마의 단호한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엄마 역시 갑자기 일어난 집안의 초상에 넋이 빠져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괜찮으시데?”라며 친구가 조심스럽게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아니, 우리 아빠 돌아가셨데.”라는 말을 뱉음과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오열을 했다.


 영안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 아버지가 날 웃으며 반겨줄 상상을 했던 나 자신이 우스웠다. 크게 다쳤다는 전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나에게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니들과 오빠가 병원에 도착했다.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둘째 언니는 바닥에 자지러지며 울었다. 첫째 언니도 계속 울었다. 초점을 잃은 엄마의 표정은 멍했다. 오빠는 생각이 참 많아 보이는 것 같았다. 


 언니들의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바라봐서였을까? 넋 나간 엄마의 고군분투를 바라봐서였을까? 택시에서 내린 이후 눈물샘이 마른 착각이 들었다. 더 이상 울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가족 모두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렸다. 나는 나의 공허한 마음을 누군가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약해진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 우는 나의 모습을 들킬까 봐 부끄러웠다. 그래서 친구와의 연락을 멀리했다. 스스로 고립의 상태가 되었다. 나는 내 마음의 공허함을 음식으로 채워나갔다. 나중에 살이 많이 쪄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 당시에 나는 내가 참 못났다고 생각을 했었다.


 어느 날 내가 연락을 멀리한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SNS를 켜 스크롤을 내렸다. 친구들의 모습은 참 고왔다. 20대 초반의 풋풋한 여대생들의 모습이었다. 한창 벚꽃이 필 무렵이라 친구들은 벚꽃과 어우러진 사진을 많이 올려놓았다. 학교에서 여러 명이 웃으면서 찍은 사진. 함께 음식 먹는 사진. 다양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친구들이 올린 사진을 구경하다가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나는 뭐 하고 있는 거지?”

 “나도 20대 초반인데 왜 나는 이렇게 뚱뚱하고 안 곱지?”     


 친구의 행복에 질투하는 내 모습에 화가 나 핸드폰을 꺼버렸다. 까만 액정에 내 얼굴이 비쳤다. 살찐 후덕한 얼굴에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친구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초라함, 속상함.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추한지 확인하려고 SNS를 본 건가?


 그 질문의 대답은 ‘아니’였다. 타인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며 나의 못난 모습을 확인하고 우울해하는 내가 보기 싫어 SNS를 지웠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당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한지를 확인하고 싶은가?

 당신 역시 나와 같은 ‘아니’라는 대답을 하겠지. 우리는 미디어의 발달로 너무 쉽게 타인의 삶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보의 범람 속에서 타인에 대한 정보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아름다워 보이고, 재미있어 보이고, 유용해 보이고 등등. 다양한 이유로 타인의 삶이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미국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한 인기 글을 읽었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CEO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0세에 사망했습니다. 반면 또 어떤 사람은 50세에 CEO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90세까지 살았습니다. 오바마는 55세에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70세에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시간대에서 일합니다.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앞서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보다 뒤처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놀리지도 맙시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대에 있을 뿐이고, 당신도 당신의 시간대에 있는 것뿐입니다.”     


  이 글의 내용처럼 세상 사람들 모두 각자만의 시간대에서 일하고, 생활한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더 많을 돈을 번다고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동갑인 친구가 좋은 곳을 놀러 다니는 것을 보며 질투할 필요가 없다. 같은 나이에 취직했는데 승진이 빠른 친구를 보며 샘을 낼 필요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뭐 하고 있지?’, ‘나는 오늘 왜 이렇게 옷을 못 입었지?’와 같은 자책도 그만둬라.


 이러한 비교가 계속된다면 타인의 행복을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폄하하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실력이 아니라 운이 좋았다고, 인맥의 덕을 보았다고 깎아내리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비교를 멈추지 못할 것 같은가? 그렇다면 당신을 기준으로 더 잘나고 멋진 사람 말고 더 못 살고 힘든 사람을 보는 것은 어떤가? 가족의 병원비가 모자라 기부를 받는 사람이나 하루 한 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말이다. 타인의 불행으로 위안으로 삼으라는 내가 미친놈 같은가? 그들과 당신을 비교하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드는가? 바로 그거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과 비교하며 당신의 삶에 위안과 행복을 찾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진다면 돈 많고 잘난 사람과 당신을 비교하며 비참하고 초라해짐을 느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잘 가꾸어 놓은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의 궁상맞은 일상과 비교하지 마라. 비교하며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행동을 제발 멈춰라.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만의 시간대를 걷고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동경을 멈추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면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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