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해보다 뜨거운 교육열 사이에서 19살 "선생님"으로 살아남기
매일 썼던 출석부
2021년, 5월의 어느 봄날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토록 기대했던 졸업식 당일의 열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시들었고, 나는 졸업식을 올린 지 2주가 채 안되어 놀고먹는 한량 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체 건강한 20살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힌 나는 큰 기대 없이 알바 찾기 사이트에 접속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글쓰기와 책 읽기 밖엔 없던 실로 백면서생 같았던 나는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어학원과 보습학원을 위주로 검색을 했고, 친절한 구직사이트는 내게 수십 개의 일자리를 제안해주었다.
내 첫 직장은 집에서 3분 거리의 영어학원이었다. 사회인이 된 것에 대한 기대감과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휩싸인 나는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 썼던 똑같은 이력서를 뽑아 들고 면접을 보러 갔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되었다. 시급 11000원, 주 5일 근무. 나는 그렇게 졸업장에 찍힌 내 이름 석자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얼렁뚱땅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학원가의 여름방학은 이열치열의 현장이다. 한여름의 햇빛만큼이나 뜨겁고 걷잡을 수 없는 한국 부모님들의 교육열에 어린아이들은 학원으로 내몰린다. 아침 9시부터 영어학원에서 수학학원, 수학학원에서 발레 교습, 발레 교습에서 피아노 과외를 전전하는 아이들에게 학업을 잠시 놓는다는 방학의 사전적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인 듯해 보였다. 제 몸만 한 책가방을 매고, 태권도 도복이나 영어유치원 원복을 입은 콩알만 한 아이들이 차에서 미처 다 먹지 못한 간식을 우물거리며 학원으로 총총 달려오는 모습은 한편으론 웃기고, 귀엽지만 사실 안쓰럽다.
“원어민이라고 하셔야 해요.”
“아, 네...”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한국어 하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 못 알아듣는다고 하시고 울거나 떼쓰면 저한테 보내세요.”
첫 출근 날, 머리를 쪽지 게 맨 카운터 데스크 선생님은 묘하게 결연한 말투로 나에게 지시사항을 이르셨다. 이 대화가 오고 간 장소가 2평짜리 청소도구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 엄숙한 말투에 꽤나 겁을 먹었을 것이다. 분명 눈은 웃고 있지만 그 표정에서는 전혀 친절함이나 온화함을 느낄 수 없는, 아주 묘한 인상의 선생님은 이내 나에게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교실 청소 및 숙제 지도 등 업무에 대한 설명을 쏟아부었다. 30분쯤 지났을까, 흔들리기 시작하는 나의 눈빛을 눈치챈 선생님은 형식적인 악수를 건네며 잘해보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곤 떠났다. 세제와 곰팡이, 커피믹스와 소독제 냄새가 뒤섞인 좁은 방의 답답한 공기 속에 홀로 남겨진 나는 "잘해봐요."라는 말이 왠지 응원보다는 경고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업무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학생이 들어오면 우선 체온 측정을 하고 마스크를 똑바로 썼는지 확인한다. 그리곤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워 교실로 들여보낸다. 아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저번 시간에 내주었던 숙제를 확인하고, 오늘 본인에게 할당된 양만큼의 책을 읽게 지도한다. 책을 다 읽은 아이가 손을 들면 작은 스툴을 끌고 아이 옆으로 가 책에 대한 질문을 한다. 책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핵심 줄거리는 뭔지,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누구인지 등등을 묻는다. 영어가 유창한 아이는 10분이고 20분이고 혼자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소극적이거나 영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와의 대화는 많은 격려, 응원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말하기 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준비해온 공책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단언컨대 어린아이들의 글을 읽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 중에 하나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결국 책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적는 아이, 현존하는 모든 문법 규칙과 맞춤법 따윈 무시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 고대 문자를 해석하는 언어학자 마냥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레 읽어야 하는 개성적인 손글씨를 가진 아이, 단 하나의 오탈자도 용납할 수 없는 꼬마 완벽주의자까지, 아이들의 글은 실로 다양하고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학원 알바 역시 즐거운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힘든 기억도 있다.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고 학원 복도에서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의 손글씨가 늘지 않는다며 나와 동료 선생님들의 영어 실력에 대해 항의 전화를 하는 아버지도 있었고, 며느리로 삼고 싶다며 추태를 부리는 원장도 있었다. 어떤 선생님이 여자 친구와 한국어로 데이트를 하다 학부모에게 걸려서 잘렸다더라, 어떤 순진한 인상의 선생님은 근무 시간보다 급여를 적게 받았다더라, 영어 실력에 따라 시급을 다르게 준다더라 등의 출처 없는 직원 휴게실 가십은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나는 학원에서 가장 어린 "선생님"이었고, 근무하는 동안 "애가 애를 가르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게 어른과 아이 사이의 그 모호한 경계에 선 나는, 두 집단의 차이를 자주 느꼈고, 이에 종종 슬펐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갈수록 가까워져 가고 있는 집단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왜냐면 아무튼 확실한 건, 난 어른들에게 지치고, 아이들에게 위로를 받았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대부분의 지나간 기억들이 그러하듯, 여름날의 학원가는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