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TX를 타고 명동까지
일산에 들어와 살면서 몇 번이나 이사를 생각했다.
일산 안에서 사는 것은 아무 불편이 없지만, 서울에 다녀올 때마다 ‘일산이 지방이 맞구나’ 싶어진다. 내가 사는 곳은 일산에서도 끄트머리, 운정에 더 가까워서 서울에 나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씩 갈아타야 했다.
‘어쩌다 한 번인데 뭐 어때’ 싶다가도, 다녀오고 나면 고단함이 배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 서울로 이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른들은 차가 있으니 덜 불편하지만, 대중교통으로 통학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일산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큰아이의 입시가 끝날 무렵, 마침내 GTX가 개통됐다.
그건 정말 ‘신의 선물’ 같았다. 체력이 약한 큰아이의 통학 문제로 작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기숙사는 거리상 어렵고, 자취를 시키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3호선이나 경의선으로 오가자니 왕복 5시간, 매일 감당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GTX를 타면 운정중앙역에서 서울역까지 단 16분.
기적이었다. 덕분에 아이는 매일의 통학 부담에서 벗어났고, 나 역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제는 아래층 동생과 함께 GTX를 타고 남대문과 명동에 다녀왔다.
작년부터 ‘한번 가자’고 말만 하다 미뤄왔는데, 동생이 먼저 “GTX 타보고 싶다”라고 제안했다. 마침 강의가 없는 날이라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소풍 가는 마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나라다.
지하 9층 아래를 달리는 고속열차라니! 기술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하 깊은 곳인데도 공기가 쾌적했고, 열차 내부는 넓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벨벳이 아닌 널찍한 쿠션 시트형 좌석인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운정에서 명동까지 단 30분. 서울에 살 때와 다를 바 없이, 오히려 더 빨리 도착했다.
우리는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뚝딱 해치우고 남대문까지 걸었다.
동생은 20대 시절, 명동에서 근무하던 때를 떠올리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마치 관광객이라도 된 듯 시장 구경에 들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볐다. 꼭 무언가를 살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 표정, 시장의 활기,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함께 걷다가 상인의 목소리에 이끌려 잠시 멈춰 섰다.
“반지나 귀걸이 구경 한번 하고 가세요!”
우리는 자석처럼 끌려 들어갔다.
동생은 귀걸이를, 나는 딸아이에게 줄 반지를 세 개나 샀다. 상인의 능숙한 말솜씨에 넘어간 셈이다.
“저희 매장은 평생 AS 됩니다. 스크래치 생기면 500원만 내세요. 금방 새것처럼 도금해 드릴게요.”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착한 가격보다도 ‘평생 AS’라는 말이 묘하게 믿음직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은 조금 지루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다음엔 인사동이나 종로에도 가보자.”
동생과 수다를 떨며 들뜬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운정중앙역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돌아와 집으로 향하는 길.
한산한 도로, 단풍빛으로 물든 나무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나들이에 신난 우리.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는 하루였다.
오랜만에,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행복을 느꼈다.
덧.
일산에 산다는 건, 늘 조금 느리게 사는 일 같았습니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던 그 거리,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오르내리던 일상 속에서 나는 종종 ‘다음에는 서울로 가야지’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GTX가 개통되었습니다.
단 16분 만에 서울역이라니, 그건 단순한 교통혁신이 아니라 내 삶의 반경을 바꾼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이 글은 GTX를 타고 명동으로 향한 하루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한 기쁨과 변화의 순간들을 담았습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당신의 하루에도 따뜻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