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배려를 받았을 때 소중한 느낌을 받을까?

쉽게 상처받지 않는 내적 세계를 단단히 세우는 길

by 마카롱 캡슐 소녀

누군가 눈사람을 정성껏 만들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무심히 망가뜨렸다. 속으로는 무언가 치밀었지만, 그 감정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내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되었다.


집단ADHD 사회성 수업에서 아이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눈사람을 만들었어. 이 눈사람을 그냥 지나쳐야 할까, 아니면 망가뜨려야 할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망가뜨리면 안 돼요”라고 대답한다. 이유를 물으면 “그래야 하니까요” 혹은 “망가뜨리면 혼나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만든 사람이 속상할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이 두 대답은 단순한 말의 차이가 아니다. 마음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아이는 ‘벌’을 기준으로 행동을 선택한다. 외부의 지시와 결과 중심 사고에 익숙하다.

두 번째 아이는 ‘마음’을 기준으로 행동을 선택한다.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과정과 감정 중심의 사고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내적 세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내적 세계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상상하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한다. 반면 내적 세계가 약한 사람은 외부의 지시와 결과에만 의존한다.

나르시시즘과 ‘소중하게 대하는 감각’

나르시시즘 성향을 가진 사람은 눈사람을 만들었을 때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이 눈사람 건드리지 마. 내가 만든 거니까 내 권한이야.”

“누가 내 눈사람을 망가뜨렸어? 감히 내 것을 건드리다니, 그건 나를 무시한 거야.”


그들은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지키기 위한 말만 한다. 남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는 자기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미음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중함은 말로만 “너는 소중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태도와 시선으로 배려하는 것이다.


잠시 맡겨진 강아지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그 감각을 경험했다. 강아지는 어떤 요구도 내게 하지 않고, 그저 지긋이 바라보며 내 곁에 머물렀다.

산책을 나가고 싶었을 것이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었을 텐데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밥을 주거나 물을 줄 때마다 묵묵히 따라주었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이해받고 있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기다려주는 마음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말이 아닌 태도로 전해지는 마음이 느껴진 감각의 소중함이었다.


이처럼 진정한 내적 세계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자라난다. 반대로 나르시시스트나 가스라이팅 성향을 가진 사람은 오직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남을 대한다.

그들의 내면세계에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감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관계의 따뜻함이 아니라, 샤넬백·멋진 집·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선물일 뿐이다.


내적 세계가 단단히 서 있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타인의 욕망에 휘둘린다. 가스라이팅은 바로 이런 틈을 파고든다. 예를 들어 지금 편안한데, 옆에 있던 나르 친구가 말한다.
“너 참 불편하겠다. 힘들겠다. 걱정된다.”

그 친구는 내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보고 싶은 감정을 나에게 강요한다.


내가 “아니야, 나는 괜찮아”라고 말해도 그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문제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내적 세계가 단단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흔들림이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표정을 의심하는 눈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평가한다. 그래서 늘 외부의 말의 반박할 만한 말을 찾는 게 자기를 지키는 무기이다.


쉽게 상처받는 내면세계의 이유는 단순히 외부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의심하는 태도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 세계가 단단하지 않으면, 작은 오해와 강요에도 마음은 쉽게 흔들린다. 따라서 남이 평가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대의 말은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공감이나 동의의 ‘개수’가 나를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적인 공감, 즉 내가 나의 평가에 대해 스스로 공감해 줄 수 있다면, 즉 자기객관화하기는 타자의 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나에게 하는 말로 들리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나는 내 감정과 마음의 편안함에 집착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지금 원하는 것처럼,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편안함이 좋기 때문에 잘해주고 있는가?

내가 느낀 편안함을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이 바로 선(善)이다. 진정한 친절은 거래가 아니며, 돈을 받을 사람처럼 의존하거나 기다리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친절은 자유로운 자기 선택에서 나오며, 그 자유로움은 상대에게도 자유를 준다.


따라서 편안함이라는 감각은 곧 자유다. 내가 편안함을 느낄 때 그것은 억압되지 않는 자유의 상태이고, 내가 그 편안함을 나누어줄 때 그것은 상대에게도 자유를 주는 행위다.


그리고 이 감각은 절대 나르시시즘이나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과는 구별되는 가치다. 나르와 가스라이팅은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관계를 조작한다. 그러나 편안함을 나누는 감각은 상대를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한다. 바로 이 차이가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는 비법이 된다.


결국 상처받지 않는 내적 세계는 이렇게 세워진다.

말이 아닌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것

요구가 아닌 기다림으로 관계를 맺는 것

거래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

편안함이라는 감각을 자유로 전환하여, 나와 타인을 동시에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나르·가스라이팅과는 구별되는 이 가치를 지켜내는 것


눈사람을 망가뜨리지 않는 사람은 결국 소중하게 대하는 감각을 아는 사람일 수 있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어서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도 있지만 , 나의 친절함의 감각과 마음의 좋음을 느끼고 알기에 , 그 친절함을 나눠주고 싶어서 행할 수 있다.


즉 편안함을 느낀 친절함은 친절함의 가치에 자유적 선택이 되고, 그 자유는 가스라이팅이나 나르시시즘의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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