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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드레 Jul 29. 2021

광기의 시대 속, '친구'의 의미를 묻다.

[책을 읽고, 생각을 잇고] '동급생'_(프레드 울만 저)

  '단언컨대 이보다 더 강한 반전은 없다', '충격과 감동의 마지막 한 문장'. 프레드 울만의 중편소설 <동급생>의 광고 카피, 혹은 이 책을 소개하는 글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장들이다. 암만 봐도 그냥 학창시절의 친구들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지 싶은데 '무슨...예전의 공포영화 <식스센스>급의 반전이라도 있나?' 하는 호기심과 함께, 동급생은 언젠가는 한번 읽어 봐야겠다 마음먹은 책 중 하나로 내게 자리잡았었다. 그리고 이 무더운 지금에서야,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소설의 길이를 먼저 파악한 후, 1932년의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안내하는 이 책을 펼쳤다. 과거 학창 시절에 같은 학년, 같은 반을 거치며 그 시절의 추억들을 함께 공유 해 온 친구들의 면면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메인광장인 슐로스플라츠(Schlossplatz)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먹먹하고 아련한, 달리 보면 아름답기도 한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 문장에서의 '그'와 같이, 유년기를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본인의 삶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유년기의 친구가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차고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각인의 계기가 무엇이 됐건 간에 그 친구는 어떤 강렬한 기억이나 추억과 함께, 이미 자신 안에서 지워낼 수 없는 불멸의 존재로 자리잡았을 테니 말이다. 당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명문고교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으로 한 학생이 전학을 오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전학생의 이름은 '그라프 폰 호엔펠스, 콘라딘'(이하 콘라딘). 호엔펠스 성에서 태어났다는 콘라딘의 자기 소개는 귀족적 잔재가 남아있던 당시 그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케 한다. 역사책에서나 배우던 가문의 후손이자 우아한 기품을 지진 콘라딘을 바라보던 대부분의 평범한 친구들은, 그를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그와 친분을 쌓고 진정한 우정을 나눠 보겠다 마음먹은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가 바로 이야기의 주인공인 '한스 슈바르츠'(이하 한스)다. 한스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로 지역에서 부족함이 없는 중산층 이상의 위치였고, 그 역시 콘라딘을 동경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렇기에 한스는 콘라딘과 친해지고자 했고, 사회적 계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국 친구가 된다.




  하지만 작 중 시대적 배경은 1932년의 독일. 나치즘의 태동과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역사를 통해 배운 지금에서야 전체주의의 광풍이 곧 불어 닥칠 것임을 자명히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 특히 10대의 순진무구한 소년들이 사회 정치적 사상에 대한 광신의 무서움에 대해서 무엇을 알았을까. 이를 반영하듯 소설은 소년인 한스의 시선에서, 불안과 긴장감이 밀려오던 암울한 시대상을 화선지에 먹이 번지듯 서서히 그려낸다. 작가이자 화가이기도 했기 때문일까. 시나브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극의 무게감을 끌어올리는 작가의 역량이 탁월하다. 물론 이전과 다른, 자신을 둘러싼 사회 분위기의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오롯이 한스의 몫이었고.



  이제 콘라딘과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콘라딘이 항상 그의 부모가 부재중인 상황에만 그의 거대한 저택에 초대하는 것에 대한 한스의 의문으로부터, 알 수 없는 시대적 이질감은 시작된다. 물론 단순히 우연에 불과하다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우연도 계속되면 현상에 대한 확신과 필연으로 변모하기 마련이다. 그뿐인가, 오페라 공연장에서 콘라딘이 그의 부모와 함께 있을 때, 한스와 눈이 마주치고도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장면에서 한스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한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왜 나를 피하는거지? 내가 '친구'라고 여겨지기엔 부족한 존재였나?" 이후 콘라딘의 이 모든 행동들은 유대인을 경멸하는 그의 부모(특히 어머니)로부터 한스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한 그의 배려였음이 밝혀지지만, 사건의 당사자이자 10대인 소년 한스가 무슨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했을까. 그는 이러한 불합리와 모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한스와 콘라딘이 만났을 슈투트가르트 주립극장, Opera house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질감에서 시작된 차별의 그림자는 교우관계를 넘어 한스가 속한 사회의 전부인 학교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학교 최초의 프로이센 출신 교사라는 '폼페츠키'가 역사 과목 담당으로 한스의 학교로 새로 부임해 온다. 하지만 폼페츠키는 유대인들을 독일 사회를 좀먹는 '검은 세력'이라 비하하며,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교단에서 공식화한다. 그야말로 노골적인 차별. 이미 나치즘의 광기가 독일 사회와 교실을 잠식하기 시작한 상태에서 "너 왜 너네가 떠나온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냐?"라며 한스를 조롱하는 급우를 향해 폼페츠키는 '우정어린 충고'라 두둔하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스의 속 좁음을 비판할 뿐이었다. 학급에서의 불합리한 차별에 상처받은 한스는, 진정한 벗이라 생각했던 콘라딘이 하교길에서 자신을 기다려 줄 것이라 믿었으나 그는 한스가 바란 곳에 서 있지 않았고, 이를 기점으로 둘의 사이는 소원해지게 된다.




  한스가 느끼던 유대인에 대한 묘한 사회적 이질감은 작은 교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확대되어, 그를 포함한 유대계 전체를 숨막히게 조여오기 시작한다. 이제 학교에서조차 나치즘의 상징인 은으로 된 '하켄크로이츠'를 자랑스레 붙이고 다니는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에서, 유대인인 한스는 사회적으로 없어져야 할 대상 혹은 투명인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소설은 이를 다음과 같은 한스의 독백으로 표현한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까지도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좋았다. 뿌리 째 뽑아 버리려는 길고 잔인한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를 인도하던 불빛들도 이미 가물가물 흐릿해져 있었다."


1933년 말, 독일 학교에서도 시행되기 시작한 '하일 히틀러' 인사법 (출처 : KBS뉴스([특파원 리포트] 잊을만 하면 되살아나는 ‘히틀러 경례’)


  이와 같은 차별과 억압이 만연한 독일 사회에서, 결국 한스의 부모는 그를 미국의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유학을 보내기로 한다. 1933년 1월 19일, 한스의 생일이자 콘라딘이 한스의 삶으로 들어온 지 거의 정확히 1년 되는 날, 한스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으로 떠난 한스는 콘라딘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게 되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네가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 슬프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도 안다. 우리의 선택은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선택이고, 나는 히틀러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만날 것임을 믿고, 내게 큰 영향을 준 너에게 감사한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30년의 시간이 흐른다. 미국에서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 한스, 당신들이 그토록 사랑한 마음의 조국 독일에서의 차별과 모멸에 저항하며 결국은 자결한 부모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독일을 떠올리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격이다." 소설의 첫 문장과 달리, 이 당시의 한스의 마음에 콘라딘이 자리잡은 공간은 없었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삶을 잊고 살아가던 와중, 한스의 옛 고교인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으로부터 자그마한 인명부와 함께 2차 대전 당시 산화한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 요청하는 호소문이 도착한다. 차별과 모멸감에 기인한 분노만이 남은 그곳에서, 피해 당사자인 한스에게 기부를 요청해 오다니. 소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의 오래전 과거라는 지옥으로부터 온 그 인쇄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내가 잊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던 무언가를 긁어 올리고 있었다.' 한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인명부를 찬찬히 읽어보다가 의식적으로 어떤 페이지를 찾아 유심히 살피게 되고, 이 소설의 백미인 마지막 한 문장(충격과 감동의 마지막 한 문장이라는 바로 그)과 함께 소설은 끝난다.



  이 책에서는 유대인들이 그 당시 겪었던 공통적인 비애라던지, 그들의 희생을 부각시키는 홀로코스트 참극이라던가 하는 등의 학살과 차별을 다루는 사건들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일상에 있을 수 있을 법한 사소한 사건들로부터 사회의 숨겨진 부조리와 정치적 무게를 짐작하게 하고, 개인, 특히 10대의 소년이 어떻게 그로 인해 존재감을 상실해 갈 수 있는지를 그림을 그려내듯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보다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여, 역설적으로 시대의 깊은 속내와 암울함을 더욱 끌어올린다 볼 수도 있다 하겠다. 소설 <동급생>을 읽는 중에는, 광기가 엄연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마치 흑백 영화와도 같은 작품의 분위기 속에서, 한스와 콘라딘 두 소년의 우정이 비록 어둠 속에서일지라도 찬란히 빛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결국은 빛바래 스러진것처럼 보이는 두 소년의 우정이 과연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예비 독자들의 몫이다.



  길지 않은 중편소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유려한 문체와 감각적 서술로 아픈 시대를 그려낸 이 소설 속 두 친구 콘라딘과 한스의 자취를 따라보며, '충격과 감동의 반전을 선사하는 마지막 한 문장'이라는 소설 마지막 문장의 여운을 충분히 느끼기를 바랄 뿐이다. 사이다와 같은 이 한 문장을 위해서라면, 한스를 서서히 조여오던 사회상에서 비롯된 고구마를 먹는 듯한 답답한 느낌은 감내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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