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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근대화 노력, 대한제국 내부청사

무지의 오해로 철거된 조선의 끝 줄기 근대건축 - 대한제국내부청사

by 홍진


서울이라는 도시는 유난히 ‘결여된 시간’을 지닌다. 조선의 목조건축이 남긴 궁궐과 골목, 그리고 고층 유리건축이 혼재하는 이 도시의 풍경에서, 근대라는 층위는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사라지거나 은폐되어 있다. 특히 대한제국기 공공건축의 대표격이었던 ‘내부청사’의 철거는, 단순한 건축적 손실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어떻게 공간과 기억을 다루어 왔는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내부청사는 단지 건축물이 아니라, 자주적 근대를 향한 정치적 의지와 제도적 실험이 구조화된 시공간적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 건축은 ‘식민지 잔재’라는 이분법적 인식에 따라 사라졌고, 그 소멸의 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한국 사회의 건축과 공간정책 전반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대한제국의 ‘내부(內部)’는 오늘날의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근대적 국가 시스템의 중추로 설계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내무부와 이조의 기능을 통합해 ‘내무아문’이 설립되었고, 이것이 1895년 4월 ‘내부’로 개편되면서 대한제국의 중앙행정기관으로 본격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내부는 치안, 인사, 지방행정, 토목 등 광범위한 영역을 담당하며, 근대적 국가 시스템 구축의 실질적 실행기관이었다. 이처럼 근대 행정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내부청사라는 건축물이 태어난 것이다.


내부청사는 덕수궁 돌담길 초입,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시대 의정부의 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무게가 매우 깊다. 이 터는 원래 국정을 총괄하던 최고 행정기구인 의정부가 있던 자리였으며, 대한제국은 바로 그 터 위에 근대적 내각 제도의 상징물인 내부청사를 세움으로써 전통과 근대의 물리적·정신적 연속성을 의도하였다. 이는 단지 행정의 이관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의 계승 선언이었다. 1899년에 착공되어 1900년경 완공된 이 건물은 벽돌조 2층 구조로, 수평성을 강조한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 석조 마감과 고전주의 장식을 결합한 전형적인 영국식 네오바로크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정면 길이 약 63미터에 달하는 이 대칭형 건물은 중앙부에 아치형 포르티코(portico)를 배치해 위계를 강조했고, 양단의 파빌리온이 전후로 돌출되며 구조적 안정감과 상징성을 더했다. 회랑과 창호의 비례, 콘솔 장식과 코니스(cornice)의 흐름은 르네상스 이래 공공건축의 미학이 근대 서울에서 실현된 드문 사례였다. 무엇보다 이 건물은 기능과 형태, 상징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완결된 건축이었다. 외관은 제국의 위엄과 안정성을, 내부는 효율적 업무 수행을 위한 공간 모듈로 구성되어, 당시 조선이 지향한 ‘서구형 국가’의 전형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 건물은 ‘적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역사적 가치 평가 없이 철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세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 자체에 내재한 정치적 맥락은 재조명되지 않았다. 건축은 언제나 권력과 이념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시간이 켜켜이 쌓이는 공간적 기호이기도 하다. 내부청사처럼 정치적 배경이 복잡한 건축일수록, 그것을 보존하느냐 철거하느냐의 문제는 사회의 역사인식과 공간철학을 드러낸다.


건축물은 본질적으로 이념이나 정치적 주장보다 느린 리듬으로 존재한다. 제도가 바뀌고 정치가 변해도 건축은 도시의 골격으로 남아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유독 이 건축의 시간성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워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정치적 진영 논리로 나눈다. 내부청사의 철거는 그 출발점이었고, 이후 서울시청 별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등 일련의 공간정치학적 결정들이 반복되었다. 건축은 정치적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 안에 담긴 시간성과 미학은 무시되었다. 어떤 건축이든 권력의 상징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의 흔적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도시에는 시간의 두께가 축적되지 않는다. 결국 기억의 부재는 정체성의 부재로 이어지고, 이는 도시와 사회의 미래를 가볍고 일회적으로 만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소멸의 태도가 오늘날까지도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에 따라 해체되는 광장, 해마다 철거와 재설계를 반복하는 공공시설, 개발 논리로 사라지는 근현대 건축들. 보존과 재생, 해석의 시간 없이 철거나 신축만이 반복되는 한국의 공간 정책은 사회 전반의 ‘공간 문해력’ 부족을 반영한다. 시민은 건축을 삶의 틀로 경험하기보다, 투자 자산이나 불편의 원인으로 인식하고, 정치는 건축을 선전의 배경이나 정권 이미지를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그 결과 건축은 공동체적 기억이나 미학적 담론의 대상이 아닌, 쓸모와 효율의 잣대에만 갇히게 된다.


내부청사의 소멸은 단지 대한제국 한 시대의 건축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을 통해 기억하고 성찰하는 사회적 기능이 부재한 구조를 드러낸다. 한 국가의 근대성은 법이나 제도, 산업화 속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간을 축적하고 보존하며, 시간과 기억을 존중하는 도시 태도에서 비로소 성숙한다. 내부청사의 외관과 디테일, 건축언어는 단순히 과거 양식의 수입이 아니라, 한국이 자주적 근대를 어떻게 상상하고 건축적으로 구현했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시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도를 존중하기보다 삭제하는 선택을 반복했다.


건축은 침묵 속에 말을 건다. 내부청사의 정면에 새겨진 아치와 기둥, 계단과 문, 그 모든 비례와 질서는 말없이 당시 사회의 갈등과 이상, 제도적 열망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 채 없애버린 것은 단지 건물 하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정신과 건축적 미학에 대한 공동체의 문해력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정권에 따라 광장의 형식이 바뀌고, 정치적 이유로 철거되는 건축을 목격하고 있다. 내부청사의 철거는 그 시작이었을 뿐, ‘기억을 지우는 방식의 정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건축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구체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내부청사가 남아 있었다면,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풍부한 시간의 감각을 지닌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 대한제국, 일제, 해방, 민주화까지 이어지는 중층적 역사의 흐름이 공간 위에 명료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는 텅 비어 있고, 새 건물은 이 장소의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정로에 남아있는 근대 건축의 공예적 디테일이 주는 감성>


그리고 이 근대건축의 소멸은 단지 정치적 이념의 산물만이 아니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것은 문화적 감수성과 공예적 전통의 단절이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내부청사는 비록 문화적 출처는 서구였지만, 그 구현 방식에는 조선 한옥에서 이어져 온 건축 수공예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조적 방식의 정밀한 줄눈 처리, 창호의 비례와 구조적 리듬, 석재 몰딩의 섬세한 조형은 단지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공예적 시간과 정신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산업화 이후 ‘속도와 효율’을 중심에 둔 반문명적 생산 중심 사고 속에서 이러한 공예적 미학을 불필요한 장식이나 낭비로 간주했다. 건축은 기계화되고, 설계는 복제되고, 디테일은 단가에 밀려 사라졌으며, 그 결과 한국 건축의 DNA였던 ‘수공적 정서’는 도시 전체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내부청사의 소멸은 단지 역사 유산의 상실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시간과 감각, 인간과 공동체를 엮어내던 문화적 질서의 해체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반복되는 철거와 신축의 이데올로기, 정치와 개발 논리의 폭력, 그리고 공예에 대한 체계적 무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 부재의 깊이를 인식하고, 건축의 물성과 기억, 공예성과 감정을 회복하는 새로운 윤리적 건축문화를 모색해야 한다. 기억을 지우는 사회는 미래를 건축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숫자보다 손끝의 감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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