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도시의 사유적 오아시스 종묘

종묘, 과거의 시간이 남겨준 여백의 공간

by 홍진

서울 한복판, 바쁜 자동차 소음과 인간 군상의 흐름을 조금만 벗어나면, 놀랍게도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있다. 종묘. 이곳은 단지 유교의 제례가 치러지는 장소로 소개되곤 하지만, 건축가인 나에게는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종묘는 건축이라는 물리적 언어로, 이승과 저승, 과거와 현재, 인간과 조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침묵의 무대다. 시내에 살던 대학시절에 머리가 복잡하고 시끄러울 때 찾아가던 곳이었다.

그럴 때마다 종묘의 고요함은 내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굳이 이곳이 종교적 색채가 있는 곳으로 생각지 않는다. 신전도 아니고, 단지 조선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공간일 뿐이다. 나의 조상도 아니니 그다지 종교적 부담도 없다. 종묘가 주는 고요함은 전체적인 공간과 숲이 주는 힘이다. 종묘의 숲은 일상의 공원이나 왕조의 화려한 정원이 아니다. 딱히 공부를 하지 않아서 이유를 모르지만, 이런 조선시대 유교적 사자의 공간에 둘러쳐진 숲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왕릉 주변의 숲도 유사한 형식이 아닌가? 아무튼 이런 숲의 고요함은 내게 묘한 차분함을 준다. 그것을 굳이 종교건축공간이 주는 무언의 압박으로 느끼지는 않는다.


이곳 종묘의 공간은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장식은 생략되고, 수평과 수직의 선들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절제된 구성이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힌다. 정전에 들어서면 19칸이 질서 정연하게 펼쳐져 있고, 각 칸은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 총 49위의 신주를 품고 있다. 외관은 모두 같지만, 보이지 않는 위계가 내부에 흐르고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반복되는 형식 속에서 우리는 조선의 시간, 질서, 그리고 권위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 긴 처마와 낮은 기단, 길게 이어진 평면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땅 위에 눕힌 듯한 인상을 준다. 거칠게 놓인 바닥돌들과 다듬어지지 않은 중심축의 바닥구성은 묘하게 다가온다. 이런 구성의 공간이 주는 고요함은 일본 교토의 공간에서 만나는 만들어진 자연의 조약돌바다와 다르다. 더구나 거대한 석판 마당으로 구성된 공간은 일 년에 한 번 고요함을 깨우는 제사의 공간이 된다.

때문에 종묘는 정적인 건축이 아니다. 매년 봄과 가을, 종묘제례가 열리면 이 공간은 살아 움직인다. 제관과 악사, 참여자들의 동선에 따라 건축은 무대가 되고, 시간은 흐르며, 공간은 기억을 연주한다. 종묘는 보는 건축이 아니라 걷고 머무는 건축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어 올리게 만드는 건축이다. 흥미로운 것은 제례에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은 종묘건축처럼 고요한 울림으로 구성되어 때로는 지루함을 주지만 때로는 사색의 순간을 자극하는 '정중동'의 소리다.


내가 서양의 대형 종교건축들을 떠올릴 때, 종묘와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차이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사자의 공간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영혼의 불멸을 위해 돌을 쌓았고, 고딕 성당은 하늘을 향해 치솟는 첨탑으로 신과의 연결을 꿈꿨다. 하지만 종묘는 그 반대다. 높이보다는 낮음을 택했고, 수직이 아닌 수평을 따랐다. 이곳은 신의 위대함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의 기억과 윤리, 그리고 죽음을 향한 조용한 존중을 담고 있다. 그래서 종묘는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자, 산 자가 죽음을 기억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살아 있는 장소다. 어쩌면 그것은 유일신의 종교와 조상에 대한 내세적 연결을 강조하는 차이일 지도 모른다. 조상을 신으로 이야기하기엔 절대적이지 않지 않은가? 절을 한다고 해서 그 대상을 신으로 절대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정서 아닌가? 아마 이 차이를 서양의 시각에서는 이해할지 모른다. 물론 깊이 있는 유교적 인물들은 그렇게 믿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절대적 존재로 조상을 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유교는 눈에 보이는 세계(형이하)와 보이지 않는 원리(형이상)의 질서를 중시한다. 종묘는 그 질서를 그대로 건축에 옮긴 결과다. 공간의 배열, 반복되는 칸의 구성, 참도의 중심축—all 이것은 보이지 않는 위계와 윤리적 질서를 시각화한 기호 체계로 작동한다. 우리가 종묘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질서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종묘의 공간 구성은 정확히 중심축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북쪽의 정전에서 남쪽의 참도로 이어지는 길은 신이 이동하는 상징이자,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다가가는 상징적 통로다. 이 길은 정직한 직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시간과 행위가 녹아 있다. 그 순간 건축은 하나의 열린 세계, 철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종묘는 누구도 살지 않는 건축이다. 그러나 그 부재 속에 존재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다. 하이데거는 건축이 거주의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종묘는 거주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인간 존재의 본질을 더 깊이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기능을 위한 건축도, 경제를 위한 건축도 아니다. 윤리와 기억을 지속시키기 위한 건축이다. 이곳이 낮고 평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교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기보다는 인간과 신의 거리를 줄이고, 일상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삶을 중시한다. 화려한 건축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래서 종묘는 눈에 띄지 않지만, 발을 딛는 순간 묵직한 감정을 일으킨다. 이것이 종묘가 지닌 ‘존재의 무게’다.


종묘를 생각하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윤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실현이다." 종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죽음, 기억, 존재의 의미를 고요한 공간으로 전한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신이 명확히 나뉘지 않고, 하나의 흐름처럼 연결된다. 건축은 여기서 조용히 중재자 역할을 하며, 어떤 이념도 앞세우지 않고, 존재의 본질을 따라간다.

기억의 방식 또한 다르다. 종묘는 ‘시간을 반복하는 의례’로 기억을 지켜낸다. 그래서 종묘는 시선의 중심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을 차지한다.


도심 한복판의 종묘는 자연과도 조화를 이룬다. 내부는 흙길과 돌, 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인공과 자연의 경계는 부드럽다. 이 담장 안의 고요한 숲길을 걷다 보면, 나는 문득 묻게 된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건축이 그런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종묘가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도시는 점점 기능과 자본, 기술과 이미지에만 지배받고 있다. 하지만 종묘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죽음을 위한 건축’이라는 역설을 통해 삶의 본질을 되묻는다. 그것은 과시하지 않고, 조용히 존재하며, 그러나 깊게 울린다. 나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이 시대의 건축이 배워야 할 원형이 있다면, 바로 종묘가 아닐까.

종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한 건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건축은 단지 벽과 기둥이 아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기억, 윤리와 철학을 담는 그릇이다. 종묘는 그것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래서 종묘는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철학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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