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오랑주리(Orangery)
어린 시절 시내에 살아서 창경궁과 종묘, 성균관대는 내가 수시로 찾아갈 수 있는 공원이었다. 7,80년대 찾아간 창경궁은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에서 본래의 궁 모습으로 전환되었던 시기다. 각종 그림대회나 사생대회도 이곳에서 수시로 했다. 덕분에 기억한 편에 남은 곳이다.
그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은 지금은 사라진 일본식 전각 건물과 온실이었다. 나중에 대온실이라는 표기를 알게 되었는데 건축을 전공하기 훨씬 전인 어릴 적 기억에도 이국적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건축을 전공하면서 80년대 후반 다시 찾은 그곳은 내게 특별히 다가왔다.
낯선 모습, 우리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구조의 긴장 속에 놓인 특별한 건축을 창경궁 대온실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 온실은 단순히 식물을 기르는 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근대의 이식, 19세기 유럽 구조주의 건축의 모방과 변용, 그리고 한국의 건축사 속에 기묘하게 삽입된 하나의 ‘시간적 균열’로 읽혀야 할 건축적 기호다.
이 대온실은 1909년, 대한제국 말기 순종 황제 치세에 완공되었다. 당시 식민지화의 그늘이 드리워지던 시기였으며, 일본은 조선의 궁궐을 자국 왕실의 원예 양식과 근대적 기술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바뀌던 그 변화의 중심에서 대온실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온실을 단지 식민 지배의 결과물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는 19세기 유럽 건축사의 결정적인 단면, 즉 구조주의 건축의 철학과 기술이 깊게 침윤되어 있다.
유럽에서 유리와 철이라는 재료는 산업혁명의 산물로 등장했다. 특히 조셉 팩스턴의 ‘수정궁(Crystal Palace, 1851)’은 프리패브 구조와 경량 철골의 조합을 통해 전례 없는 투명성과 공간성을 구현하며 근대 건축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구조는 단지 기능적 해법이 아니라 공간미학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철골은 얇고 강력한 구조체로 내부 공간을 최대화하며 동시에 외관의 리듬과 질서를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이와 유사하게 창경궁 대온실도 철과 유리로 구성된 투명한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건물 전체를 구성하는 구조는 기능의 결과이자 형태의 근거이며, 이는 구조주의 건축의 핵심이다.
이 온실의 흥미로운 지점은 기능적 구조물에 장식이 가미되어 있다는 점이다. 철골 프레임에는 곡선형 장식과 식물 모티프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는 고딕의 수직성과 아르누보의 유기적 선율이 혼합된 듯한 양식을 보여준다. 기능과 구조가 주도하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장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을 새로운 재료인 철에 새겨 넣었다. 이는 아돌프 로스가 『장식과 범죄』(1908)에서 비판한 바로 그 시대정신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창경궁 대온실의 장식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유리와 철이라는 비인간적 재료에 생명감을 부여하고 자연이라는 본래의 기능적 배경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구스타프 에펠이 설계한 그 시절 철골 구조물에도 유사하게 보이는 이런 장식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본래 건축은 구조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만, 그것이 놓인 맥락과 결합할 때 비로소 문화적 존재가 된다. 창경궁 대온실은 전통 궁궐 공간 속에 서구식 유리온실이 삽입된 형태다. 기존의 전통 건축들이 목재와 흙, 기와라는 유기적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이 온실은 철과 유리라는 비유기적이고 기계적인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질적 재료의 삽입은 당시 조선 사회가 마주한 문명 전환기의 문화적 충격을 반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질성은 풍경 안에 묘한 조화를 이루며, 창경궁의 전통성과 함께 새로운 조형적 균형을 창출한다. 이는 구조의 순수성과 장식의 감성, 기술의 근대성과 전통의 역사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능한 긴장 속의 아름다움이다.
구조의 순수성과 장식의 감성, 기술의 근대성과 전통의 역사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능한 긴장 속의 아름다움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창경궁 대온실은 ‘투명한 장막’이다. 유리는 빛을 통과시키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문다. 유리의 존재는 건축을 ‘닫힌 대상’에서 ‘열린 장(field)’으로 전환시키며, 보는 이로 하여금 내부 식물과 외부 자연을 하나의 시야로 통합하게 만든다. 이는 20세기 후반 미술과 건축에서 ‘환경적 총체성(environmental totality)’이라는 개념이 강조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실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철골 프레임의 반복적인 리듬은 시각적 안정감을 제공하고, 중심축에 위치한 온실의 대칭적 구도는 바로크적 질서의 느낌마저 전한다. 이로써 대온실은 식물의 생장을 위한 기술적 구조물이자, 인간 정신의 질서를 구현한 미학적 장치가 된다.
건축사적 맥락에서 이 온실은 한국 근대 건축사의 중요한 유물이다. 이는 단지 온실로서의 기능이나 공간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도입된 방식, 기술, 재료, 형식, 공간 구성의 총체가 당대 조선이 마주한 건축적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이 온실은 당시 기술자들과 장인들이 서양 건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또 그것을 조선의 공간 문화 안에 어떻게 녹여내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일종의 '모방의 시대'에서 기술 수입과 현장 제작을 통한 혼합적 수용은 건축을 단순한 기술 이식이 아닌 문화 번역의 과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대온실과 주변 조경은 ‘근대의 얼굴을 한 정원’이다. 창경궁은 전통 왕실의 정원으로, 본래는 자연을 품은 사유와 유희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대온실은 과학적 관리와 기술적 재현의 공간으로 변모한 정원의 상징이다. 이 변화는 자연의 순환성과 비가시성을 기계적 논리와 시각적 통제 속에 가두려는 근대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 온실은 근대가 자연과 맺은 관계, 즉 대상화된 자연의 형상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며 기술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다. 이런 기술은 일종의 권력을 드러내는 표상으로 19세기 유럽 귀족들이 앞다퉈 온실에서 열대 식물을 키우는 것이 유행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폴레옹 3세 시절 프랑스 에는 '오랑주리(Orangery)'라고 불리는 유리 온실을 두어 겨울철에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다.
요컨대, 창경궁 대온실은 단지 온실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의 미학, 장식의 회귀, 재료의 혁신, 근대적 시선의 삽입, 자연과 인간의 철학적 거리를 모두 아우르는 복합적인 건축이다. 한국 건축사 안에서 이 온실은 서양의 구조주의가 가장 순수하게 반영된 공간일 수 있으며, 동시에 전통 경관과의 혼성적 조화를 통해 독자적인 미학을 창출한 사례다. 오늘날 우리는 이 온실을 단순한 문화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기술과 감성, 역사와 철학, 그리고 아름다움의 층위를 읽어야 한다. 그것은 건축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한국 근대건축의 기원을 상징하는 장소다. 아쉽게도 이런 맥락이 주도될 수 없었던 역사적 환경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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