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 국립민속박물관을 바라보는 시각

직관적인 건축이 만들어낸 민족주의감성

by 홍진

그렇게 경복궁을 가도 신기하게 눈에 안 들어오는 건물이 있다. 바로 국립 민속 박물관이다. 내가 처음 이 건물을 인식한 것은 경복궁으로 소풍 갔던 시절이고, 나중에 대학 다니면서 포스트모던 사례를 찾다가 보게 되었다. 건축을 전공하면서 보니까 참 신기한 건물이었다. 누가 했을까?

이 건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논란도 별 다른 언급도 없다. 아무튼 신기방기한 건물. 왜냐면 초보적 동물실험처럼 이것저것 짜깁기한 모습 때문이었다. 나중에 잡지를 보다가 아라타 이소자끼를 비판하면서 온갖 꼴라쥬한 이미지로 비평하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튼 그렇게 기억 저편에 있었는데 우연히 읽은 기사에서 이 건물 철거 소식이 전해졌다. 건축계는 고요 잠잠 그 자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을 설계한 이가 그렇게 회자되는 건축사가 아니니.

다만 이런 무심한 흐름이 참 아쉬운 사람이다. 왜냐면 적어도 관련 분야에서는 뭐라도 언급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세워질 때만큼 허물 때도 조용하니...

국립민속박물관을 둘러싼 철거를 보면 한 건물의 존치 여부를 넘어, 한국 사회가 건축을 통해 기억을 다루는 방식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힌다. 사실 건축계도 조용한 건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이 건물은 무심하게 흘려도 되는 사건이었을까? 건축적 해프닝으로 수십 년을 경복궁 한 자락을 차지했는데?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종종 미학적 선호나 행정적 효율로 결론을 서두르며 공간을 빠르게 정리해 왔다. 그러나 이 건물은 ‘옛 모양을 흉내 낸 실패작’으로만 단정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말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국가가 스스로를 서사화하던 격동기의 미학과 논리를 외피에 새긴 장치이며, 전통과 국가, 교육과 상징정치가 서로 얽히는 과정을 실물로 보관해 온 드문 기록물이다. 이 기록성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철거를 곧바로 ‘정답’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건물과 함께 스스로를 해석하는 능력도 덜어낼지도 모른다.


이 박물관의 얼굴은 잘 알려진 사찰들의 요소를 노골적으로 짜깁기한 콜라주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의 기억이 낱장의 조각처럼 겹겹이 붙는다. 전통의 구조적 원리를 현대 재료로 재구성하기보다는, 한눈에 읽히는 상징어휘를 빠르게 구축하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 거대한 석단은 국가의 단(壇)으로, 다층 지붕은 민족의 표식으로 번역되고, 그 위계는 관람객의 시선을 즉각적으로 통제한다. 미감의 차원에서는 과장되고 직설적이며 때로는 키치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직설성 덕분에 이 건물은 1970~90년대 한국이 전통과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결합했는지, ‘가독성 높은 기호’라는 언어로 얼마나 단단하게 묶어냈는지를 텍스트처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편집적 태도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읽을 때 더 또렷해진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건축은 모더니즘의 금욕에서 돌아서 역사와 기호를 다시 호출했다. 로버트 벤투리는 복잡성과 모순을 통해 금지된 장식을 되돌려 놓았고, 찰스 무어는 피아차 디 이탈리아에서 고전의 파편들을 연극처럼 배치했다. 제임스 스털링은 노이에 슈타츠갈레리의 고전적 프레임과 산업적 재료를 교차시켰고, 리카르도 보필은 신고전주의 도상을 과장하여 집합주거를 기념비화했다. 콜린 로와의 ‘Collage City’는 이러한 흐름을 도시 이론으로 끌어올려, 원본과 복제, 기념비와 일상을 편집하는 거대한 표면으로 도시를 보았다. 국립민속박물관도 같은 편집의 문법을 취한다. 다만 서구의 많은 사례가 역사와 도시의 다층적 맥락을 비교적 느슨하게 중첩했다면, 이 박물관은 ‘민족–국가’라는 단일한 구심을 향해 기호를 수렴시킨다. 유희나 아이러니보다 ‘정답처럼 읽히는 기호’가 우선했고, 박물관이라는 프로그램의 교육성이 그 선택을 뒷받침했다.

지붕과 기단은 이 건축의 정치학을 드러내는 핵심 장치다. 분단 체제의 심리전 속에서 북측이 거대한 한옥형 지붕을 체제의 위용으로 소비하던 시절, 남측 역시 상징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국립민속박물관의 구성은 ‘지붕=정체성’이라는 도상을 전시장 외피로 고정한다.

이러한 수사는 흥미롭게도 국가주의가 파시즘화 되던 나라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1930년대 일본과 독일이다. 문민정권을 뒤엎고 세력을 장악한 일본 군벌들의 시대인 1930년대 일본의 제관양식(帝冠様式—서양식 석조의 기단 위에 일본식 지붕을 얹어 근대의 합리성과 전통의 초월성을 동시에 표상하던 방식)과도 평행한다. 이 당시 독일 역시 건축가 출신의 로젠버그와 쌍을 이루는 야망가 슈페허가 차용한 건축은 미스 반 데 로에의 기하학적 모더니즘이 아닌 팍스로마나의 근대적 차용이었다.

차이를 말하자면, 제관양식이나 슈피어(Albert Speer)의 신고전주의는 중앙 권력의 절대성을, 북측의 네오전통주의는 체제의 영속성을,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국가’의 동일화를 강조했다는 정도다. 그러나 세 경우 모두에서 지붕은 구조물이 아니라 문장이며, 하중이 아니라 정체성을 받친다. 수평이던 경사던 거대 지붕은 단단한 물질이면서 동시에 권력이 쓰는 언어다.

재료와 구조의 윤리도 이 건물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이룬다. 국립민속박물관 이후 전국의 공공 박물관·미술관에 콘크리트 지붕과 기와 모양 마감이 범람했다. 누구에게나 즉시 읽히는 ‘한국적’ 표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경향은 교육적 가독성을 확보했다. 아이러니하게 이렇게 자란 민족주의가 오늘에 와서 정치적 이념에선 진보로 불리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아무튼 그 시절 목조 공포의 역학과 비례는 철근콘크리트의 몸체에 얇은 장식으로 번역되었고, 구조와 장식의 간극은 커졌다. 비평이 따져야 할 지점은 ‘가짜냐 진짜냐’의 도덕률이 아니라, 이러한 번역이 사회적 합의로 정착하는 과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표피의 진실성보다는 표식의 유효성을 택했다. 무어의 피아차 디 이탈리아가 도시 한가운데서 재치와 유희를 통해 인용의 위선을 드러냈다면, 이 박물관은 엄숙과 교육을 통해 동일한 장치를 공적 규범으로 만들었다. 같은 인용이라도 목표가 다르면 윤리 또한 달라진다.


동아시아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건축의 매너리즘적 성격이 더 잘 보인다. 쿠마 겐고의 1990년대 초기작 ‘M2’는 과장된 기둥과 페디먼트, 석조풍 아케이드를 도시 표면에 콜라주 하여 기괴한 장면을 만들었다. 그는 훗날 이를 ‘실패’로 선언하고 안티–오브젝트로 선회했지만, 과잉의 인용이 만들어낸 자가 풍자적 어조는 국립민속박물관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흥미롭게 이 건물 상업 임대건물이다. 21세기의 권력은 자본주의임이 확실하다.

쿠마에게 아이러니는 자기반성의 장치였지만, 국가가 발주한 박물관의 언어에서는 아이러니가 허용되지 않는다. 국가는 자신을 농담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 다 원본의 권위를 현재의 표면으로 이식했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이지만, 하나는 거리 두기이고 다른 하나는 결속이다.


서구의 직접 인용 건축가들과의 대조도 유효하다. 여러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은 각 지역별 서구의 고전 언어와 지역적(인도나 기타 식민지 특징을 넣어서) 기호를 혼성시켜 ‘제국의 적응’을 설계했고, 권위주의 체제에서 알베르트 슈페어의 신고전주의는 압도와 복종의 심리를 기념비로 형상화했다. 이 사례들이 말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인용은 언제나 ‘누가–무엇을–어떻게–왜’와 결부된다. 권력이 전통을 이용할 경우는 국수주의적 선동이나 구호가 되기 쉽다. 이른바 국뽕의 과장이 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역시 전통을 풍성한 해석의 대상으로 풀어놓기보다, 국가가 승인한 기호로 봉인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직설적 차용은 후대 건축가들에게 두 과제를 남겼다. 하나는 표식의 차원을 넘어 전통의 구조적·공간적 논리를 현대 재료로 재구성하는 일, 다른 하나는 교육적 가독성과 다의성 사이에서 공공건축의 언어를 새로 쓰는 일이다.


장소성과 풍경의 차원에서도 이 건물은 해석을 요구한다. 박물관은 북악산을 등지고 광화문 축에 서서, 거대한 석단과 다층 지붕으로 산의 윤곽을 모방·증폭한다. 문제는 경복궁이라는 '진짜' 역사적 공간을 하나의 무대 세트로 가볍게 만들어 버린 점이다. 때문에 스케일에서 압도하여 경복궁 목구조의 비례 체계와 충돌한다. 궁의 간결한 리듬과 깊은 음영은 박물관의 매끈한 콘크리트 표면에서 경직된다. 경복궁은 자금성이나 심지어 교토의 사찰들 보다도 스케일이 차분하고 인간적이다. 혹자는 국가의 경제적 부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유교적 관념체계로 나라를 이끈 조선이어서 제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아무튼 민속박물관이 차용한 원본의 비례를 임의로 확대·축소하여 긴장과 부조화를 의도하는 이 태도는 다시 매너리즘의 감각을 불러온다.


이제 이 건축에 대해 습관적 판단을 잠시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 국립민속박물관은 ‘발명된 전통’의 즉물적 표현이다. 둘째, 이것은 ‘표면의 정치학’을 드러내는 증거다. 지붕과 난간, 공포와 기단은 구조적 진실보다 정치적 진실—국가적이고 정치적 수단—을 수행한다. 셋째, 이것은 실패와 성공이 중첩된 복합체다. 전통의 공간 논리를 재해석하는 과제에서는 실패했을 수 있으나, 로버트 벤튜리의 이론처럼 쉬운 기호다. 넷째, 이것은 영향의 출발점이었다. ‘콘크리트 기와 박물관’의 유행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이후 수많은 국가 건축물, 심지어 독립기념관까지 유사형태의 출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거는 ‘무엇을, 누가, 어떤 근거로 기억할 것인가’라는 공동의 질문이 행정의 대상이 될 때,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처리의 대상으로 축소된다. 불편한 유산을 지울지 읽을지는 민주적 학습의 문제다. 베를린이 동독의 팔라스트 데어 리퍼블릭을 두고 10여 년에 걸친 공개 논쟁과 전시, 의회 표결과 기록을 축적하며 결과를 선택했을 때, 절대적으로 옳았느냐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정 자체를 교과서로 만들었다.

한국은 결과를 중시하는 만큼 논쟁을 제도화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그 빈틈이 반복적으로 후회를 낳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만큼은 그 습속을 넘을 필요가 있다.

이 건물에는 철거와 보존의 이분법을 넘어, 최소한의 윤리와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설령 철거가 불가피하다 해도, 요소의 해체 과정 전부를 3D 스캔과 부재 번호화로 기록·공개하고, 석단의 모서리나 공포 한 경간 같은 대표 요소를 ‘전환된 유구’로 남겨 새 맥락에서 전시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완전 복원을 선택하더라도 바닥 라인워크나 얇은 강재 프레임으로 지워진 건물의 윤곽을 보행 경험 속에 트레이싱하여 기억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새 박물관에는 ‘왜 이 건물이 지어졌고 왜 철거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상설 서사로 마련해 논쟁과 기록을 교육의 일부로 편입해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 건물보다 생각을 보존하는 태도만이 삭제를 성찰로 바꾼다.

이러한 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는 전통을 둘로 나누어 보는 시각이다. 하나는 표식으로서의 전통, 다른 하나는 생활세계의 구조로서의 전통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전자의 극단을 체현했다. 표식은 빠르게 통한다. 기와지붕은 한눈에 읽힌다. 그러나 전통의 더 깊은 층은 그림자의 리듬, 마당과 처마가 만드는 공기의 미묘한 흐름, 재료의 촉감과 온도 같은 비가시적 원리다.

선원전 복원이 이 두 번째 층위를 회복한다면, 우리는 지우는 대신 ‘다른 방식의 기억’을 선택할 수 있다. 다만 그 길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지워지는 첫 번째 층위—국가가 전통을 표식으로 운용하던 20세기의 실물 증거—를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사회적 문해가 함께 자라야 한다. 복원은 하나의 진실을 되찾는 동시에 다른 진실을 잃는 일임을 인정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원은 미화가 된다.


결국 국립민속박물관을 바라보는 가장 간명한 비유는 이것일지 모른다. 이 건물은 잘 지은 집이라기보다 시대의 단면이다. 껍데기로 가리고 과장을 해도 단면은 실제를 보여준다. 거대해 보이지만 실상 이 건물의 내부는 빈약하긴 하다. 그렇다고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철거하는 것은 조금 아니지 않은가? 이런 논쟁이 시끄럽게 들리고 비 생산적인 소모전같이 보이지만, 가치가 있다. 논쟁을 제도화하고 기록을 남기며 사유를 전시할 때, 설령 건물은 사라져도 그 건물이 던진 질문은 남는다. 그리고 그런 질문이 남아야 반성도 가능하다. 다만, 건축계도 조용한데 사회에서 알턱이 있을까?

#트럼프 #고전주의부활

ps.

소비에트 연방이 처음 만들어질 때 엘리트 건축가들은 이성적 건축이 가능하리라 봤고, 일단의 이상주의 엘리트 건축가들이 작업했다. 그렇게 나온 구조주의. 하지만 스탈린은 이들을 부르주아의 지적 유희로 보고 대대적 숙청을 한다. 그리고 서구의 클래식이 재등장했고, 구 소비에트 대학이 대표적이다. 히틀러 역시 네모나고 장식 없고, 심플한 바우하우스를 싫어했다. 이에 야망가인 슈피어는 팍스로마나의 20세기 버전으로 웅장한 고전주의를 도입하고 주도했다. 당연히 히틀러는 대만족 했고, 베를린을 20세기 로마로 만들려 했다. 1700년대 독립한 미국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성공의 품격을 위해 유럽의 궁전들을 사모으고 시작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괴된 귀족의 저택과 궁전의 부분들은 해체되어 미국 부자들의 집 장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양한 유럽의 클래식인 고전주의가 미국 곳곳에 등장했다. 이른바 네오 클래식 또는 네오 조지안 스타일, 콜로니얼(식민지) 스타일이다. 특징은 과장된 장식인데 미국 동남부 도시 찰스턴이 대표적이어서 찰스턴 스타일이라고도 한다.

영국왕 찰스가 현대건축, 특히 하이테크 건축을 극도로 싫어하는 건 유명하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영국 전원풍 (우리로 치면 초가집 마을?) 도시를 만들었다.

요즘 트럼프가 고전주의 건축으로 모든 걸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의 마라라고 별장은 스페인 풍이다. 영국 골프장도 클래식하다.

아! 건축의 복고주의가 등장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린 따라하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면 우린 그런 걸 완성할 장인이 없다. 허투루 만들면 안 만드니 못하다. 쪽팔린다. 내가 좋아하는 김성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 나오는 어설픈 저택은 의도인지 한계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다.


#건축 #한국건축 #건축감상 #건축분석 #공공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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