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로 표현되는 카페와 펜션건축들
어느 순간 부터 해안가나 강변, 완만한 구릉지등에 지난 십여 년 사이 새로운 건축 유형이 촘촘히 박혔다. 조금 눈에 띈다. 물론 도심에도 늘어나고 있는데 형태적으로 강한 모양새가 시선을 사로 잡는다. 대형 베이커리 카페와 ‘스테이’로 불리는 숙박 시설이다.
이들 건축들의 모양새 만큼이나 건축재료의 특징도 보인다. 대리석이나 벽돌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노출 콘크리트의 조형적 형태를 강조하고, 공간적으로는 바다·들·하늘을 배경이 아닌 장치로 끌어들인다. 일단 눈에 띈다는 점은 시장의 어법으로 말하면 훌륭한 브랜드 자산이고, 도시·건축의 용어로 말하자면 경관 위에 놓인 소형 메가폼이다. 특히 2010년 전후로 이런 현상이 자주 목격되는데 유행일까? 그런데 그렇게만 보기에는 한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국의 오늘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축인 자본, 매체 그리고 장소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선 노출 콘크리트는 여기서 상징이라기보다 매체에 가깝다. 중성적 회색과 질감의 미세한 차이는 카메라에 강하게 반응한다. 클리커블(Clickable)한 이미지가 도달해야 할 인스타그램같은 SNS로 중계할 가치가 있는 포인트를 가장 경제적으로 달성하게 해주는 표면이 바로 이것이다. 생경한 형태, 켄틸레버의 과감한 돌출, 깊게 파인 프레임, 수평으로 미끄러지는 슬래브는 구조적 논리를 과장함으로써 인생 한 컷 같은 조형적 어휘를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잘 보이는 건축’을 만든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건축은 시각 중심의 소비를 견제할 수 있는 “건설의 문화”(culture of construction), 곧 건축의 구축적 윤리를 함께 가져야 한다. 건축의 형태를 이루는 물리적이고 물질적/ 미학적 구성의 이유가 확인되는 재료와 구조가 만나는 이음, 물과 바람과 빛에 맞서는 디테일의 진실, 기후와 지형을 받아들이는 것들의 건축적 시각이다. 건축가가 오로시 이런 건축 자체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정성것 만들어지는 사유적 핵심’이 빠지도 무대세트의 잠깐 등장하는 요소로 사용된다면, 노출 콘크리트는 잠시 쓰고 버리는 소모품적 요소가 되어 버린다.
즉, 그 건축의 생명력이 다하거나 소진되면 노출 콘크리트를 제안하고 완성한 건축가의 성과는 대리석으로 덮여지거나 형태가 파괴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어차피 잠시의 SNS에 등장 하는 것일 뿐이니.
두 번째는 장소의 문제다. 한국의 상업 건축은 주로 도시 경계부, 관광-농촌 혼합지대, 도심 외곽의 공장지대가 해체된 틈을 점유한다. 이들 지역은 싸다. 이런 ‘땅값이 만든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장소의 언어를 빈곤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풍부한 자연과 장대한 전망이 조형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순간, 건물은 스스로의 내적 문법 대신 풍경의 권위에 기댄다. 건축 철학가들이 주장한 ‘보편 문명과 지역 문화’ 사이의 비평적 균형을 설파하며 제시했던 “장소-형(place-form)의 저항”은, 그 곳의 카메라 화면속 장면이 매력적인 풍경인 경우 오히려 더 어렵다. 강한 배경은 약한 건물을 용인한다. 그러므로 진짜 시험대는 외딴 절경이 아니라 일상의 변두리에 놓인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주차장과 간선도로, 조야한 간판과 송전탑등을 끌어안는가에 있다. 오늘의 대형 카페·스테이가 장면을 넘어 ‘근린의 밀도’를 조직하는가, 아니면 전용 주차장과 포토 스폿으로 지역을 관통해 지나가는가. 이 질문 앞에서 다수의 사례는 아직 변명에 가깝다.
세 번째는 운영의 문제다. 이 유형들은 철저한 자본주의적 시장 운영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 공간 자체가 성업적 관점에서 설계되는 것이다. 진입의 느슨한 압축, 주문·대기·착석·촬영·이탈을 이어붙이는 동선, 포토 스폿의 간섭 최소화, 회전율과 체류시간의 미세한 조절.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경험의 가치’이다. 이런 경험의 가치는 의미 있다. 다만 이 가치가 오롯이 ‘썸네일을 만드는 기계’로만 작동되는 것은 아쉽다. 좋은 건축은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건축사적 대상들을 비평하고 강조해온 건축적 가치들, 촉각적 경험, 머무름의 시간, 빛과 공기의 유량은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서 생긴다. 동선은 시나리오여야 하고, 디테일은 편집점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썸네일이 아니라 롱테이크로 건축을 설계하고 비평해야 한다. 오늘의 상업건축 다수가 ‘한 장면의 탁월함’에는 성공했지만, ‘한 편의 시퀀스’를 넘어서는 '감동적 스토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이런 노출 콘크리트와 건축적 언어로만 만들어가는 건축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만, 놀라운 것은 인스타적인 상업건축을 긴 안목의 문화적 대상으로 전환 해버리는 힘도 가능하다. 바로 안도 다다오가 그 예다. 안도 다다오의 여러 건축들은 철저한 상업 논리로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도구인 경우도 많다. 결혼식장으로 사용되는 가짜 교회인 물의 교회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건축적 유희, 언어들은 이런 상업주의의 휘발성을 넘어 긴 호흡으로 숙성시키고 있다. 같은 콘크리트를 쓰고 시각적인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만들어내는 결과는 완전 다른 셈이다. 한쪽은 침잠하는 시각의 설계, 다른 한쪽은 순환하는 장면의 조립. 재료의 유사성 뒤에 윤리의 차이가 숨어 있다. 한국의 상업건축이 안도적 표정의 일부를 응용할 때,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안도다다오가 구사하는 건축적 ‘명상의 언어’ 가 비슷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다른 후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한국의 독특한 대형 베이커리 카페나 스테이는 제도와 시장의 요구임이라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주거에 집중된 한국의 과한 규제 체계는 상업용도에서 상대적 자유를 허용했고, 자본은 그 틈에서 볼륨의 과감함을 마케팅의 지렛대로 삼았다. 각종 건축상 수상과 매체는 결과의 조형성에 점수를 주었고, 운영의 탁월함은 보조지표가 되었다. 마냥 긍정적이지만 않은 이런 현상을 조금 더 우리 모두의 도시 유산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상업적 결과일지라도 말이다. 공존의 가치라고 할까? 예를 들면 맨하탄의 하이 라인은 뉴욕에서 , ‘공간 운영’을 도시의 공공가치와 시장의 자본주의적 결과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핵심은 '경험의 가치'를 확장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고, 누구나 인용할 수 있도록 주변일대를 허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결과 하이라인 주변은 주거지도 형성되고, 화랑가가 들어서고, 기업의 공간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를 응용하면 대형 카페·스테이가 형태의 격전지가 아니라 공공성의 현장화가 가능해진다. 사실 그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구로구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구로평상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보면 상업적 가치의 확장이 어떻게 지역사회의 공공성을 혼합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표절과 유사성 논쟁은 이 생태계의 불편한 파생물이다. 판결은 형태에 선을 그어 명확히 했다. 하지만 이런 판결 이전에 이런 사업을 진행하는 발주처 자체가 낮은 레벨의 경영전략이 아닌 자신의 사업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공간을 통한 가치의 핵심은 경험이다. 많은 이용자가 체감하는 것은 ‘경험의 닮음’이다. 형태는 쉽게 복제되고, 경험은 규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경험의 닮음은 공공적 가치로 보면 긍정적이다. 그러한 경험을 나열해보면 첫째, 오브제에서 환경으로. 카페나 스테이가 단절된 조형물이 아니라, 유휴공간의 보행 연결, 로컬 산업·공예의 공급망, 계절 노동과 배움의 리듬과 얽히는 공간 플랫폼이 될 때, 가치가 확장된다. 둘째, 성능과 감성의 합성. 단열·열용량·음향·미세기후 같은 성능을 조형의 언어로 드러내면, 지속가능은 ‘보이는 친환경’이 아니라 ‘감각되는 쾌적’으로 전환된다. 셋째, 운영을 서사로 번역하기. 진입에서 앉음까지 40초, 주문에서 자리로 90초, 야외 테라스로 15초—이 시간들을 의식화하는 시퀀스를 설계하면, 재방문이 새 발견이 되는 건축이 가능하다. 넷째, 형태의 언어 바꾸기. 결과의 사진이 아니라 과정의 데이터, 형태의 독창성과 문화적 성과를 제공해야 한다.
작금의 한국 건축의 큰 특징인 상업건축의 자유로움을 보면서 몇 개의 간명한 물음—“이 건물은 어떻게 서 있는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지역과 장소,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관계로 구축되는가?”—에 대한 지역적, 동시대적 답변을 요구한다. 한국의 상업건축은 ‘시선을 끄는 찰나의 경제환경’의 문법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 성취를 부정하거나 비난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제는 일점쇄선 같은 마디만이 아닌. 쉼표와 숨표, 괄호와 각주가 있어야 문장이 길어지고, 긴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상상과 감정, 기억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단순한 장소 마케팅의 상품이 아닌 문화가 된다.
결국 한국의 대형 카페와 스테이는 우리 시대의 욕망을 정직하게 비춘다. 나는 그 욕망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길들이는 일, 곧 건축의 구축과 장소의 해석과 관계를 통해 속도에 기억을 더하고 싶다.
한 장의 썸네일로 시작된 건축은 한 편의 롱테이크로 기억되야 하고, 그것이 오늘 한국 베이커리 카페와 스테이나 일시적 현상이나 유행이 아닌 정착되야할 건축의 진짜 과제다.
#건축 #한국건축 #건축감상 #건축분석 #상업건축 #카페건축 #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