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화위지(橘化爲枳), 젠틀몬스터의 전략도구 건축과공간

성수동 젠틀몬스터 사옥에 대한 건축적 비평

by 홍진

원래 이 감상문은 기존의 서울에 있는 건축에 대해서 쓰려고 시작한 것이다. 소쇄원을 처음 시작글로 쓴 이유는 조선의 원림이고 건축이지만, 표현된 공간적 내용이나 건축적 문법들이 역사적 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지만 충분히 현대적이고 당장 설계에 반영해도 좋을 개념적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건축은 과거의 진부함이 아니라 언제든 부활하고 현재에 사용할 수 있는 건축의 언어들이다.

그런데 공사중일 때부터 일부 스토리를 알고 있던 건물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니 나도 한번 이야기 해보고 싶어졌다. 항상 그렇듯 건축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의 대상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분석할 수 있다. 왜냐면 건축은 건축 그자체로 해석은 사람들 몫이기 때문이다.


성수동의 눈에 띄는 젠틀몬스터 사옥 이야기다. 도시의 하늘을 절단하듯 매달린 캔틸레버와, 과도하게 증식한 라티스, 유선형으로 다져진 저층부의 콘크리트 띠. 성수의 젠틀몬스터 사옥은 ‘브랜드-플랫폼-스펙터클’이 하나의 도식으로 접합된 오브제다. 그러나 이 건물의 흥미는 단순한 인스타그래머블한 파사드에 있지 않다. 이 건물의 여러 가지 배경을 보면 건축비평가들의 흥분된 주제로 충분하다.


한눈에 봐도 이 건물은 부루탈리즘적으로 표현된 건축이다. 1950~70년대 전세계를 휩쓴 건축의 중요 흐름중 하나였던 부르탈리즘 건축이 한국에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건축되지 않았다. 그러면 부르탈리즘 건축이 무엇인가? 사실 부르탈리즘은 사실주의의 거친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모더니즘의 극단적 진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사회주의적 순수성에 기반한다. 시각적 표현 때문에 거친 콘크리트의 외형적 스타일로 느끼지만, 핵심은 스타일이 아닌 정직성/ 공공성/ 노출성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1950~70년대 지어진 부르탈리즘 건축의 상당수는 사회주의적 배경에서 나타난 건축들이 대부분이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센터나 사회 복지 주택, 공공기관 등의 용도들이었다. 부르탈리즘이라는 용어는 건축적 표현을 묘사한 프랑스어 éton brut(거친/날것의 콘크리트)에서 유래했다. 원래 부르탈리즘 건축은 장식을 지양하고, 구조와 설비를 노출시키고, 거친 물성의 구조를 드러내는 본질적 순수함을 드러내며 실용과 평등의 미학을 표방한 것이다.

어떤가? 오늘날 우리 나라에 지어지고 있는 수많은 부르탈리즘 스타일(Style)과 철학적 바탕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21세기 들어서 등장하는 부르탈리즘 건축을 Brutalism 2.0으로 부르는데, 나는 이를 K-Brutalism 2.0으로 부르고 싶다. 왜냐면 곽희수로 대표되는 한국 부르탈리즘 건축은 철저한 자본주의적 마케팅 도구로 스타일이 적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와 건축사적 개념과 완전히 다른 바탕이다.

이는 힙합과 히피 등의 서구 저항의 문화가 한국에서 기업성장의 소구로 활용된 음악산업과도 유사하다. 오늘의 한국은 모든 철학과 사유, 문화 등의 모든 것을 자본주의, 특히 시장 자본주의가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리지널의 생태계를 가진 서구나 일본과도 다르다. 이들 문화의 태생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의 마케팅 소구로 사용 되는 것에 대한 심리적, 문화적 반발이 존재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힙합의 분노가 존재할 수 없고, 히피적 저항의 바탕이 되는 기성사회의 경직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기 한국은 정치적 업압과 맞섰기 때문에 전혀 다른 문화가 존재한다. 때문에 부르탈리즘이나 힙합의 장르는 다르지만, 표피적 수단으로 차용되는데에 전혀 부담이 없다.

자 그렇다면 다시 이 매력적인 “신사 괴물, 또는 친절한 괴물” 사옥을 이야기 해보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건물을 설계한 시스템 랩에서 여러 가지 디자인을 제안했고, 발주처는 계속 뭔가 다른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안다. 그렇게 해서 한번 던진 디자인을 바로 승낙해서 놀랐다는 소문이 있다. 와! 성은이 망극할 만한 낙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모험을 선택했을까?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사옥은 최소한 또는 적정한 비용을 들여야 할 필요한 건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들은 그동안의 마케팅 전략을 보면 이런 공간자체를 철저한 브랜드 마케팅 도구화 함을 알 수 있다.

당장 이 사옥을 준공하자마자 틸다 스웬튼이 등장하는 광고에서 활용하고 있다. 마케팅 전략이 매우 탁월한 기업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업의 브랜딩 전략은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그렇지만 건축의 시각에서 본다면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건축 디자인 과정은 자세히 모르니 드러난 완성체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거대하고, 한편으로는 괴기스럽기 한 이 건물은 이미 인스타에 수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다들 생경한 모습에 한마디씩 한다. 성공적 전략이다. 공사비는 일반 건물의 몇배가 들었지만, 광고효과를 생각한다면 충분한 투자가치가 있는 선택이다. 그런 선택 받은 건물은 건축적으로 매우 조형적이고, 과장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원래 시스템 랩의 건축 상당수가 과장과 왜곡된 형태들을 드러내는 일련의 작업들을 발표해 왔다. 유사한 흐름으로 건축하는 곽희수의 경우는 조금씩 양태를 변형해 가면서 그의 시그니춰같은 형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시스템랩은 완전히 다른 형태를 추구한다. 물론 유사 항목들이 조금씩 존재하기도 한다. 젠틀몬스터 사옥의 코드를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현대건설 주택 체험관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그동안 시스템랩이 추구해 온 “즉각적 가독성의 조형어휘”가 자본주의적 도시 운영과 어떻게 합의하고, 동시에 브루탈리즘적 물성의 완고함으로 그 합의를 일부 저항하는가에 관한 복합적 장면에 있다.


이 사옥을 관통하는 언어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선체의 은유—곡면의 저층부는 브랜드 물류와 체험을 싣고 내리는 항만의 기단처럼 작동한다. 둘째, 외골격의 은유—중층 라티스는 운영 체계와 데이터화된 리듬을 시각화하며, 기능을 숨기지 않는 노출의 윤리를 통해 브랜드의 가공되지 않은 근육을 드러낸다. 셋째, 지휘탑의 은유—상부의 캔틸레버는 조망과 통제의 장치로서 도시 시선을 포획하고 방향을 지정한다. 이 셋은 비릴리오가 말한 전쟁 산업적 도시—속도·관측·지배—의 기하학으로 수렴하면서, 동시대 상업 건축이 추구하는 ‘순간 포획→확산’의 알고리즘으로 이해된다.


시스템 랩의 김찬중이 지난 작업들에서 눈에 띄는 특징을 보면 첫째, 자기 과시적 외관의 극대화. 둘째, 눈에 띄기 위한 조형의 과잉 배치. 셋째, 과잉을 정당화하는 기술-서사. 자기 과시는 표피적 허영과는 다르다. 그는 표피를 두껍게 만들어 표면 자체를 구조처럼 보이게 한다. 라티스와 캔틸레버가 실제 구조 효율과 무관하게 ‘구조처럼 보이게’ 하는 순간, 외관은 성능의 은유가 되고 성능은 스토리텔링으로 치환된다. 눈에 띄기 전략은 더 노골적이다. 당장 시각적 충격은 규모와 볼륨, 이질적인 형태들의 적층으로 충분하다. 이런 이질적 구성의 병치를 시스템 랩의 김찬중이 주도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이는 통상적인 건축적 디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실은 아니지만 통상 한국 발주처들의 과도한 개입, 예를 들면 네이버 사옥 설계당시 발주처 담당의 주관적 디자인 개입처럼 젠틀몬스터도 건축가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 과정에 어떻게 개입을 했던, 결과는 건축가의 몫이다.

사실 이 건물은 건축적 지향성, 특히 건축은 규모가 커질 수록 본질적으로 공적 의무감이 있다고 본다면 이 건물은 통상의 분양 임대건물과 다를 바는 없다. 당장 도쿄나 맨하탄의 수많은 건물들의 지층과 저층부가 어떻게 대중 또는 이용자와 공간적 관계를 형성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튼 이건물 방문자는 건축의 ‘공간 논리’를 이해하기 이전에 ‘조형 이벤트’를 체험한다. 과잉 표현은 여기서 태어난다. 과잉은 불필요의 축적이 아니라, 과잉을 통해서만 확보 가능한 주목 경제의 우위를 겨냥하는 계산이다. 마지막으로 기술-서사는 과잉을 합리화한다. 파라메트릭, 외피 성능,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ESG 재료성 같은 용어는 비평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차폐막으로 동원된다. 이 삼중주가 젠틀몬스터 사옥에서 절정으로 응집한다.

브루탈리즘이 본래 지녔던 윤리는 ‘환상 거부’였다. béton brut, 날것의 콘크리트를 통해 건물이 하는 일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사회적 프로그램을 숨기지 않는 정직. 성수 사옥은 이 윤리를 표층적으로 호출한다. 라티스는 구조를 노출하는 듯 보이고, 콘크리트 저층부는 재료의 무게를 감춘 적이 없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하지만 면밀히 보면, 이 노출은 절반의 노출이다. 라티스는 구조-기능-브랜드의 삼중 레토릭을 동시에 맡지만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즉, ‘정직’의 형식이 ‘스펙터클’의 기능으로 전용된다. 눈으로 보여지는 가시적인 가능한 것만이 실재가 되는 체제에서, 사옥은 스스로의 전시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기계가 된다. 이른바 스스로 관종을 자처한다고나 할까? 그런 특징은 영동대교에서 바라보이는 상층부에서 더 두드러 진다. 캔틸레버는 박스들은 비행장 관제탑 조망 장치처럼 도시의 시선을 향하고, 라티스는 픽셀화된 피드의 그리드와 공명한다. 건축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오래된 명제가 여기서는 뒤집힌다. 이 건물에서 건축은 곧 이미지이며, 이미지가 곧 운영이다.

건축이 이미지로 소비되는 21세기를 간파한 영리한 전략인 것이다.

법규·수익·브랜드 매뉴얼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상황에서, 건축가가 개입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는 형식과 장면의 과잉일지 모른다. 젠틀몬스터 사옥은 그 마지막 통로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과하다. 하지만 바로 그 과함이 자본주의적 합의의 논리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논리의 빈틈—변하지 않는 물성, 불친절한 장면, 포획되지 않는 의미—을 벌려 놓는다. 합의와 저항이 동시에 박힌 이중 결 속에서

그리고 이 건물의 과잉 표현은 종종 디테일의 완강함과 결합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라티스의 조인트, 콘크리트 띠의 수평 슬롯, 코너 반경의 통일성 같은 요소가 형식적 과장을 공학적 설득으로 접지시키면, 건물은 “크게 떠드는 외관”에서 “견디는 물체”로 전환된다. 이 전환이 충분히 달성되는가가 사옥의 장기적 가치를 가를 것이다. 브루탈리즘이 그랬듯, 이 건물도 시간이 흘러 표면이 얼룩지고 모서리가 닳아갈 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그때 이 과잉은 ‘쇠퇴하는 상업의 폐기물’로 보일 수도, ‘도시가 견딘 시간의 증거’로 보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될지는 사용과 돌봄의 정치가 결정한다.


부르탈리즘의 태생적 의미와 전혀 상관 없는 마케팅 도구가 된 이 경우, ‘날것 그대로의' 재료와 거친 질감을 사용함으로써, 소비재를 파는 공간을 단순히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넘어선 '진정성'을 강요하고 있다. 왜냐면 이 위압적이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득이라면 훨씬 개방적이고 오감적 경험적이어야 하지만 이 경우는 철저한 오브제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유기적인 덩어리와 기하학적인 프레임은 방문객에게 강렬하고 파격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건물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브랜드의 정체성을 체험하는 '콘텐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부르탈리즘 건축들은 대체로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 완성되었지만,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철거되었지만, 아마도 이 친절한 괴물은 오래도록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다. 건축적 ‘저항’의 언어가 자본주의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용된 것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틀몬스터 사옥은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저항의 흔적을 내포하고 있다.

브루탈리즘 건축은 “유지비가 많이 들고 파괴하기도 어렵고” 또한 “쉽게 리모델링하거나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건축가의 의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점이 오늘의 한국 건축가들이 선택하는 이유 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친절한 괴물의 견고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는 패션 산업의 유행과 달리 쉽게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보여준다. 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소비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속성과 근본적으로 대치된다.

그런데 이런 지속성이 기업입장에선 좋은 것 아닐까? 사람들이 실증내지 않고 계속 찾아와 주는 대상이 된다면?


자! 그렇다면 나는 이 건물을 무조건 비판하고 있는가?

대답은 NO!

한국 발주처들의 강력한 개입을 이미 경험하고 있고, 심지어 그들이 자기작품이라고 떠드는 수도 없는 상황을 체험한 입장에서, 이 건축은 발주처에 순응한 듯 보이지만, 역으로 그들을 엎어치기 하고 있다. 더 과장되고 과잉된 표현으로 몸을 부풀려서 구애를 하던 싸움을 걸던 우리 사회에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건물은 한국 건축계의 유일무이한 자기 발언 건축일지 모른다. 이토록 강하게 소리친 건축이 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논란이 되던, 주목을 받던, 찬사를 받던, 대단한 건축으로 인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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