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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낢 Sep 01. 2024

이메일 제목만 봐도 보인다

며칠째 반려인의 잔업요청에 시달리다보니 어느새 반나절 일꾼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길고 긴 방학이 드디어 끝나는 날이라 설레어서 잠도 설쳤는데 기가 막히게 아이들 개학날 오전부터 일거리들이 날아들었다. 인공지능 굴려가며 영상도 하나 만들고 온라인 미팅도 한차례하고 나니 점심도 못 먹었는데 어느새 첫째 하교시간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국대접에 시리얼을 한 사발 말아들고 소파에 앉았다. 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불량식품만 한 것이 없다. 나는 일을 미루는 성격이 못 되어서 일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손을 쉬지 못 한다. 그러니 앞으로 두세주는 편치 않을 것을 알기에 속이 더 쓰렸다. 그러면서도 시리얼 사발을 든 채 수시로 메일 앱을 들여다 보다가 젊은 고객사 직원의 이메일에 혀를 찼다. ’쯧쯧쯧… 요즘 사람들은 이메일에 제목을 왜 쓰는지 모르는건가?‘


’안녕하세요. 000건으로 메일드립니다‘

혹시 제목을 쓰지 않아서 내용 첫줄이 그대로 보이는 것인가 해서 본문을 다시 보았다. 메일 본문에 인사가 포함되긴 하지만 분명 다른 내용으로 시작된다. 한동안 노래제목이며 책제목들을 길게들 짓더니 이것도 유행인가. 모름지기 제목이란 글의 내용을 함축하여 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짓는 것이 아닌가. 굳이 예의를 차리고자 메일 제목마저 공손하게 쓴 것이라면 더 큰 문제다.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일이 적어진 요즘은 교환하는 문서의 형태나 구사하는 문장 등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좌우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건 이런 제목을 달아 보내는 사람을 아주 유능한 인재라고는 못 하겠다. 일면식도 없이 카메라도 켜지 않은 온라인 미팅에서 말 몇마디 안 섞었는데 메일 한 건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는 와르르 무너졌다. 물론 첨부된 서류도 엉망이었다. 처음보내는 업무메일에 표지도없는 메모를 참고자료로 첨부했다. 예의라고는.


최소한 다른 사람의 메일을 참고하거나 인터넷에서 ’비즈니스 이메일 쓰기‘라도 한 번 찾아봤으면 이렇게 날 것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참고자료를 첨부할 요량이었으면 최소한의 서류 양식을 갖추고 받는 사람이 필요할 법한, 또는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리해서’ 담는 것이 정상적인 직장인이 아닌가.
나는 그 메일이 미숙하게 느껴졌을 뿐더러 상대방의 무관심과 나태함이 불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기술도 없고 정성도 없이 아무렇게나 차려진 밥상을 대접하면서 말간 얼굴로 맛있게 드시라고 내미는 젊은이를 마주한 것 같았다.


업무상의 예의는 일상의 그것과 다르다. 서툴고 모자라도 공손하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상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직장에서의 미숙함은 불손함과 동일시된다. 직장은 정글이고 업무상 커뮤니케이션에서 서로의 시간과 노력은 아껴야할 제한된 자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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