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런저런 핑계로 회사를 그만 둔 진짜 이유는 권태였는지 모르겠다. 직장인은 3,6,9년 주기로 권태기가 와서 그 전 후로 이직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업주는 이직할 곳도 없으니 10년 꽉 채운 어느날 홀연히 회사를 떠나버리기로 작정한 게 아닐까.
근래에 회사에 일이 많아져서 한 두가지 간단한 잔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번 주에는 3일간 각기 다른 외부 촬영 감독을 봐야할 일이 생겼다. 아이들이 봄방학으로 집에 있는 주간이라 굳이 이번 주에 집을 비우려니 조금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오랜만에 찾아온 이 평화를 야금야금 좀먹게 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에 구멍이 생긴다는데 모른척 할 수도 없어 친정엄마에게 아이들을 부탁했다.
"그날은 바쁜데.."
엄마도 내가 일을 그만 둔 이후 운동도 다니고 문화센터에서 사귄 새 친구들과 여가를 즐기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내가 일하기로 한 3일 중 첫째 날은 친정아빠가 아이들을 봐주기로 했다.
'오늘 오후에 수영강습 가는 날이야. 잊지 말고 가야해.'
할아버지가 아이들 밥까지 챙기기는 어려우니 점심은 배달 시켜주겠다고 하고 나섰다. 나서는 길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수영 강습 준비물을 몇 번이나 상기시켜 주고 아빠에게도 절대 잊지 말고 1시 30분 전에 집에서 나서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넋놓고 있다가 학원에 못 간 적이 몇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될 쯤에 첫째 아이에게서 수영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전화가 왔고, 나는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손을 숨긴 채 메시지를 토닥거렸다. 조금 있으니 가족 단톡방에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조용한 스튜디오에 진동소리가 퍼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전화기 볼륨을 죽여놓기 때문에 다행히 특유의 경박스러운 신호음은 나지 않았다. '촬영중' 짜증을 누르며 간단히 메시지를 보냈다. 불안한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눌렀다고 한다. 나는 그 와중에 당일 촬영본의 가편집안을 거의 실시간으로 완성했다. 갑자기 잡힌 일정이기 때문에 상세 스크립트 없이 간단한 시나리오 정도만 들고 촬영이 되었지만 촬영 중 어느 부분을 살리고 어느 부분을 인트로에 넣을지가 기계적으로 그려졌다. 서로 아이들 안부도 묻는 익숙한 얼굴들과 눈 감고도 할만큼 익숙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이 일과에 얼마나 익숙한가 다시 한번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절머리가 쳐졌다. 이 불안과 혼란을 내일 또 반복해야하다니.
창업 후 몇 년간은 미친듯이 바빴기 때문에 첫째 아이는 친정엄마가 키우다 시피 했다. 아이를 차에 태워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면 문화센터, 도서관, 미술학원, 근처 공원... 안 가본 곳 없이 아이를 끌고 다녔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이라 아이가 엄마도 없이 집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으면 그렇게나 안쓰러워 보였다고 한다. 나는 나대로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아직 기저귀도 못 뗀 아이를 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이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엄마, 천천히 다녀. 운전 조심해야해.' 신신당부를 해도 늘 불안했다. 친정엄마 차 뒷 유리에는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손녀가 타고있어요. 천천히 갈게요.] 나의 걱정을 담아 세상 모든 운전자들이 이 두 조손을 지켜줬으면 해서 고민고민해서 만든 스티커였다. 운전자는 할머니이고, 어린 아이가 같이 타고 있으니 혹여 불편을 겪더라도 양해바란다는 뜻이었다.
불안과 걱정을 일컫는 말 중에 '염려'라는 말이 있다. 염려는 생각과 감정들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마음이 분주한 상태를 말한다. 몸이 여기 있어도 마음은 수십갈래로 갈라져 각기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 상황에 놓인 경험이 있다. 아니 어쩌면 누구나 늘 그 상태에 붙잡혀 있다. 현재의 나, 지금에 머물러 마음을 집중하며 사는 충실한 삶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익숙해지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채로 적응해간다. 열정을 다 해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아직 이틀이나 더 남았다. 하지만 덕분에 용기를 얻은 것 같다. 이제는 확실하게 일을 그만두기로 한 나의 결정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기적인 결정일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의심했지만 결과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는 것도 모두에 대한 기만이다. 충분히 마음을 담지 않은 작업이 탁월할 리 없고 실체도 없는 걱정들만으로는 아이를 자라게 하지 못할 것이며 각각의 마지노선에서 해야할 일을 해냈다고 내 삶에 충실하다고 말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삶은 언제 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촛불이다. 감히 그 앞서 재주를 넘고 곡예를 하며 건성건성 간수하면 안 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레 닥치는 작은 위기들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리게 실감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자주 그 앞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실례를 범한다. 오늘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날 중 하루를 살았다. 다시 말해 난은 날 중 하루가 줄었다. 내일 또 하루가 밝을텐데 웬만하면 최대한 많은 마음들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매일을 보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