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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머 Feb 14. 2024

엄마도 물 먹을래?

아이들은 어른보다 너그럽다. 서툰 부모를 한없이 기다려준다. 아이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실체도 없는 조바심에 쫒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워킹맘으로서 못 해준 것들을 가득 채워주리라. 짧은 국내 여행도 많이 가고 큰 아이가 좋아하는 베이킹도 하고 거실에 커다란 전지를 펼쳐놓고 물감놀이도 해줘야지. 원대한 계획들로 마음이 분주했지만 결국 작년 겨울방학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내고 말았다. 오히려 작년엔 워킹맘이라 미안한 마음에 아득바득 강원도 여행을 두번이나 갔는데 올해는 미리 예약해 두었던 베트남 여행외에는 집을 떠나지 못 했다. 방학 시작 즈음에 어줍짢게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맡게 되어서 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방학이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숨을 좀 돌리는가 싶었는데 다시, 봄방학이다.


나의 한심한 후회와는 별개로 아이들은 천진하기만 하다. 그래도 엄마가 집에 있어서 좋다고 한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딩굴다 보면 청소는 큰 의미도 없고 빨래는 매일해도 부족하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첫째와 보내는 오전시간은 평화롭다. 오전에는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같이 둘째 픽업을 가거나 첫째가 학원에 간다. 그렇게 며칠 딸아이를 보는데 오전 내내 티비만 보는 아이에게 조금 미안했다. 내가 다니는 스쿼시장 옆에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롤러장이 있는데 아이를 데려가면 무료한 오전을 알차게 보내기 좋을 것 같았다. 스쿼시 초보인 엄마도 코트가 비어있는 날은 마음이 편하니까 롤라 초보인 딸도 무인 롤러장이라면 부끄럼없이 적응할 수 있겠지. 감기기운이 있었고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지만 방학 내내 아이를 티비앞에 앉혀놓으면 안될 것 같아서 아이를 데리고 나섰다


아이가 혼자 적응해야 앞으로 나도 운동할 시간이 날 것 같아 롤러장에 아이를 혼자 두고 나왔다. 바퀴가 달린 보행기도 잡혀주고, 한바퀴 같이 돌아주고 나왔지만 온 신경이 아이에게 가 있었다. 열 걸음만 가면 롤러장이었고 큰 소리만 나도 다 들릴 듯이 건물 전체가 조용했지만 그래서 혹시 무서워하지는 않을지, 수줍어서 구석에 서있는 것은 아닐지, 심심해 하면 어쩌나 싶어서 10분에 한번은 가서 들여다 본 것 같다. 의외로 아이는 보조기구를 밀고 혼자 넓은 롤러장을 잘 돌아 다녔다. 처음 한 바퀴를 돌 때는 아장아장 서툴던 아이가 두번째, 세번째 올 때마다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이 보였다. "언제든 가고 싶으면 얘기해. 크게 부르면 엄마한테도 들리니까." 나는 아이가 혼자 롤러를 신고 벗을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래서 아이가 가중간에 화장실이 어딘지 물으러 왔을 때 깜짝 놀랐다. '문턱을 두개나 넘어서 보행기도 없이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아이는 태연하게 신발을 갈아신고 왔다. 그리고 낯선 건물에서 혼자 화장실에 갔고 다시 롤러를 다시 단단히 신을 줄도 알았다. 아홉살은 사회생활 2년차 경력자였다.


모녀의 첫 오전 운동이 끝나고 나는 몸이 더욱 좋지 않았다. 열도 오르고 기운도 빠졌다. 집에 가도 아이 밥을 챙겨줄 수 없을 것 같아서 가까운 국수집에 들렀다. 아이는 우동을 시켰는데 젓가락질이 서툴어 우동가락을 건지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눈물이 가득차서 눈이 빨개지도록 화가 치미는 것이 보였고 지켜보던 나도 여태 젓가락질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컨디션이 정상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스스로 달래며 한 가닥씩 집어 숟가락에 얹어주고 있었다. 한 가닥, 한 가닥. 먹는 속도는 어찌나 느린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한이 드는데 아이는 아직 반도 못 먹은 상태였다.


"엄마, 물 먹고 싶어"

평소 같으면 내가 가져다 주겠다고 했을테지만 너무 기운이 없었다. 게다가 그런 과보호가 젓가락질도 못 하는 아이로 키우고 있는 것 같아서 정수기를 가리키며 스스로 가져오도록 했다. 의외로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컵소독기에서 컵을 꺼내더니 뒤돌아 보며 물었다.


"엄마도 물 먹을래?"

방금전까지 치밀었던 화가 녹아내렸다. 연습이 조금 필요한 것들도 있지만 아이는 잘 크고 있다. 늘 내가 모든 것을 채워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이는 이미 그대로 가득 찬 단단한 인격이다. 오히려 텅빈 강정같은 어른을 촉촉하게 채워준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동안 엄마로서 주지 못 한 것들을 몰아줘야한다는 강박에 짓눌려 직장생활 못지 않은 압박에 시달렸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가져다 준 물컵을 받아들고 알게 됐다. 나는 아이들에게 못 받은 빚이 정말 많구나. 그동안 미뤄두었던 빚을 다 받아야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루에 한 번은 정성들여 밥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저 한끼 떼우는 밥이 아니라 돈받고 파는 음식처럼 정성을 쏟아서. 살림이 익숙한 것도 아니고 요리도 잼뱅이지만 레시피를 찾아서 재료를 준비하고 SNS를 뒤져서 기가 막힌 플레이팅 고수들을 흉내내 본다.   


아이들 음식이라 레시피보다 간을 적게 하기 때문에 정말 맛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조잡하기 그지 없는 내 플레이팅에 감동해준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살펴보는 모습만으로도 폭탄맞은 듯한 주방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적지 않은 돈을 받고 일해도 이런 만족감을 주는 프로젝트는 없었는데 내 아이는 매일 매일 어제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마치 벼르고 별렀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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