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반려인이 뜬금없이 이번 주말에 본인 혼자 아이들과 본가에 가겠다고 했다. 언젠가 왜 남자들은 아내없이 본가에 안 가는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큰 반응이 없기도 했고 그 이후로도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쌩뚱맞았다.
"갑자기? 왜? 애들이 엄마없이 잘 수 있겠어? 어머님, 아버님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것같은데? 아니 아들이 갑자기 애들 데리고 본가에 혼자 오겠다하면 이상하게 보시지 않겠어? (딸이 애들데리고 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의식의 흐름을 쫒아 질문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밖에 말로 내뱉을 수 없는 어둠의 질문들을 아울러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냐고 순화시켜 물어봤지만 태연하게 유난할 일이 아니라며 이번엔 본인이 혼자 다녀올테니 주말에 좀 쉬란다. 그러고 보니 작년 설에는 아버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무슨 드라마를 보셨는지 올해는 애 아빠랑 첫째만 보내고 작은 아이 데리고 친정에 가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제안을 하셔서 놀랐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냐며 웃어넘겼는데 아버님의 명절일정 제안이 이어 반려인까지 나서는 것을 보면 세상이 변하고 있기는 한가 보다.
나는 혹시 모를 오해를 막으려고 어머님께 먼저 전화를 드렸다. 아범이 무슨 바람이 났는지 휴가를 다 준다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어머님도 웃으시며 그런 날도 있어야 한다고 응원해주셨다. 엄마없이 아이들만 가면 고스란히 어머님 고생이 더해질텐데도 시어머니가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응원해주시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며칠전부터 엄마가 함께 가지 않는 것을 설명했다. 다섯살 짜리 둘째는 아직 뭘 잘 모르니 그렇다 치고 절대 안 된다고 눈물을 글썽일 줄 알았던 첫째도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때까지만해도 걱정이 더 컸다. 애들이 엄마 찾으면 어쩌나, 남자 혼자 애 둘데리고 다니다가 휴게소에서 애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그런데 하루 하루 주말이 다가올수록 걱정은 쏙 들어가고 2박 3일간 이 집을 독차지할 생각에 부풀어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설거지도 쌓이고 빨래도 쌓였다. 남자들이 왜 아내가 애들 데리고 친정가는 날을 특별히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집이지만 온전히 내 집인 적이 없는 이 공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설렘이라니. 느긋하게 내 집 대청소도 하고 온전히 텅 빈 내 집에서 혼술도 하고 손가락이 불어터지도록 목욕도 해야지.
금요일 퇴근 후에 출발하기로 했기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짐을 쌌다. 옷가지도 넉넉히 싸고 칫솔, 치약, 로션, 상비약까지 꼼꼼히 챙겼다. 물론 평소에는 손도 안대는 반려인의 짐도 대충은 싸두었다. 네시에 오기로 한 사람이 다섯시까지 연락이 없었지만 진심으로 전혀 화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늠름한 그가 현관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반가움이란.
시끌벅적 아이들이 한바탕 떠들고 내가 못 다한 잔소리를 쏟아내는 사이 반려인은 자기 짐을 바람처럼 싸더니 문을 나섰다. 여섯시가 다 되었지만 저녁은 가는 길에 먹겠다며 서둘러 아이들을 불러냈다. “아빠가 짐이 많으니까 작은 캐리어는 누나가 끌어줄래?” 어리광쟁이 첫째가 아빠와 같이 있으니 웬일인지 어른스럽게캐리어를 끌고 나가 손을 흔들었다. “이따 엄마 보고싶으면 전화해. 잘 다녀와. ” 아이는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그날 밤도, 다음 날 밤도 전화는 없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복도에 울리던 아이들 목소리가 사라지자 음악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실감이 안 나서 잠시 쇼파에 기대 앉아 가만히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났다.너무 조용해서 졸졸거리는 어항 여과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춤이라도 출 것같은 행복감에 조바심마저 났다. 어쩌면 잠시 춤을 췄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액션 영화를 틀고 과자 봉지를 들고 소파에 앉아서 야식배달을 검색했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수제햄버거도 좋고 얼큰한 양곰탕도 군침이 돌았다. 살없는 어린 닭에 튀김옷을 잔뜩 입혀 통으로 튀겨내 바삭한 옛날 치킨과 얼큰한 양념이 베어 쫀득하니 맛있는 대구뽈찜의 경합끝에 막걸리 한병과 대구뽈찜을 주문하고 웬만한 냄비보다 큰 플라스틱 배달그릇에 담긴 뜨끈한 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쓰레기장 같은 거실 바닥에 발끝으로 쓱쓱 밀어 자리를 만들고 앉아서는 제이슨 스태덤님과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저녁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방해없이 해가 뜰때까지 통잠을 잤다.
우리 부부는 나름 합리적이어서 종종 서로에게 휴가를 준다. 하루씩 돌아가며 호캉스를 즐기기도 하고 결혼 5주년차에는 서로에게 2주간의 휴가를 선물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그 모든 휴가 보다도 집을 비워 준 이번 휴가가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여행계획을 짤 필요도 없고 반드시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한다는 강박없이 일상속에 끼어든 정직한 휴식이 너무 기특하고 반가웠다. 특별할 것도 없이 냉장고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를 해치우는 이틀이었지만 반려인이 아이들과 함께 돌아왔을 때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었다.
전에는 늘 영화같은 일이 일어나길 꿈꿨다. 뜻밖의 이벤트, 분에 넘치는 선물, 일생일대의 행운… 하지만 알고보면 우리는 이미 영화 속에서 살고있다. 나를 둘러싼 조연들에게 숨쉬듯이 감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