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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낢 Feb 03. 2024

언니, 지천명은 50이야.

최근들어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1. 혼자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는 것과 2. 그럴때면 어김없이 영어로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혼자말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영어로 혼자말을 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도 좀 같잖았다. 외국어를 전공했고 외국어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그 시절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은 덕이었지 흔히들 말하는 이중언어자도 아니고, 외국 유학경험도 없다. 물론 영어는 더욱 특출나게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업무상 영어를 쓸 일이 생기면 스크립트를 써놓고 몇 번이나 교정을 보고, 이메일도 수백번 고쳐 써서 보낸다.

어쩌다 혼자말을 영어로 하기 시작했을까. 그 시작은 2년쯤 전에 영어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였던 것 같다. 연습은 해야겠는데 누가 들을까 창피해서 차에서 연습을 했다. 아마 그것이 속으로 하던 생각을 소리내어 말해본 첫경험 이었다. 첫경험이 영어 프리젠테이션이라 그 이후로도 쭉 영어로 혼자말을 한다고...?


또 한가지 알게된 것은 혼자말을 할 때 어디서 주워들은 표현이나 구문을 통째로 인용한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인 과반이 그렇듯이 영어강박으로 영어 콘텐츠를 많이 보는 편인데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제스쳐나 억양, 표현들을 '복붙'해서 활용했다. 사담이지만 외국어 공부를 할 때 이 방법에 도전해보기를 권한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특별한 사교육없이 외국어 특기생이 된 이유도 책을 통으로 외우는 습관때문이었다. 통으로 외우면 말할 때 단어가 아니라 문장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더 빠르게, 오류없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자주 말문이 막히고 처음으로 돌아가 고쳐 말하면서 중얼거렸다. 굳이 혼자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며 거창하게 혼자말씩이나 하고 있다니 습관이 무섭다 생각하면서 방금 중얼거린 콩글리쉬를 한국말로 해보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어로 말할 때보다 더 자주 끊기고 어색한 문장들만 튀어나왔다. 달변은 아니지만 사회생활하면서 말문이 막힌 적은 없는데 혼자 말하다가 막히다니.


머잖아 이런 경험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과 셋이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내 말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평소에 만나던 사이가 아니어서 그런가 생각했다. 물론 평소에 만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너무 오랜만이라 대화 주제도 시대와 배경을 넘나들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돌아오는 길 매일 대화하는 절친과 통화하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니, 지천명은 50이야.

5살쯤 어린 내 절친이 (매번 나이를 묻지만 매번 잊어버린다.나이는 너무 자주 바뀌니까) SNS에 올린 게시물을 보고 마흔은 불혹이고 쉰이 지천명이라고 일깨워주었다. 무심결에 세상이치 깨달으려면 멀었다는 의미로 '#지천명은개뿔' 이라는 해시테그를 달았는데 가만 생각하니 지천명은 쉰이군. "아, 맞네. 그렇네. 히히, 괜찮아. 어짜피 내 피드는 무인도에 있으니깐. 히히히히." 깔깔 거리면서 통화하는 동안 말이 술술 나오고 대화가 끊김없이 자연스러웠다. 조금 전 대학동기들과 대화하던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투도 달랐다.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도 달랐다 하지만 묘하게 모든 것이 내 절친과 매우 닮아 있었다. 반대로 대학 동기들과 만났을 때는 그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고 말투를 흉내내어 말했다. 자세마저 달랐던 것 같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거울효과를 몸으로 실감하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업무상 만나는 고객과 대화할 때는 의식적으로 톤을 맞추기는 한다. 그러지 않을 수도 없다. 점잖은 사람과 미팅하면서 방정맞게 말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리고 반대로 쾌활한 고객을 만나면 나도 한결 캐주얼한 무드를 지킨다. 하지만 사적인 모임에서도 굳이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하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뒷통수가 따끔거리며 스치는 생각이 가장 불쾌했다. 어쩌면 나는 내 스타일이 없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어떤 무드에 맞출까.


혼자말을 할 때도 영상물 속 배우들의 표현과 억양을 따라 하는 이유도, 한국말로는 말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어쩌면 나만의 스타일이 없기 때문일까. 혼자말을 중얼거리며 사색가라고 착각했던 시간이 순간 부끄러워졌다. 그저 이런 저런 잡다한 영상들의 잔상을 곱씹으며 리플레이하는 녹음기였을 뿐 내 생각을 발전기에 넣고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간반복이 가능한 2세대 녹음기 처럼.


지천명은 그렇다 치고 마흔이 넘으면 속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여전히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하게 모든 변화에 흔들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나마 모르고 불안하던 때보다는 성숙했다고 위로해야하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세상이 만들어준 캐릭터로 살다보니 진짜 내 안에 사는 사람은 어떤 인격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요즘 5살박이 둘째가 자주 묻는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우주비행사가 되고싶어. 나는 우주에 가서 우주인을 만날거야." 계획이 똑부러져서 좋겠다. 조금 더 크면 알려줘야지.

나중에 누가되고 싶은가 보다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지천명은 개뿔.

너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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