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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머 Jan 29. 2024

운동은 핑계고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빴을까.

늘 시간이 없었다.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꼭 하고싶다 생각한 일들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에 18시간 이상 앉아 일을 해도 밥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살려고 시작한 요가레슨도 시간맞춰 나가기 어려워서 레슨 시간을 매주 옮겨대는 불량 학생이었다. 도대체 뭐하느라 그렇게 바빴을까. 지금은 기억도 아득하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운동이었다. 운동에 재미를 붙일 요량으로 구기 종목을 생각했는데 골프는 취향에 맞지 않고 테니스는 파트너가 필요한 운동이라 언제든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스쿼시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기존에 해온 요가 수업에 더해서 스쿼시 레슨이 추가되어서 주 3회 오전 운동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오전 내내 다른 스케줄이 없기 때문에 성실하게 운동에 집중했다. 그리고 30대부터 숙원사업이었던 피부과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예약잡기가 쉽지 않았다. 후기도 살펴보고 동선을 고려하면 후보도 많지 않고 운동가는 날과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보다가 결국 포기했다. 급한 성격에 예약을 해 놓고 한달씩 기다리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쉬운 일부터 하기로 했다.


피부 관리에 실패하자 문득 치아교정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때 처음 교정 상담을 받은 이후로 주기적으로 교정 생각이 났었는데 매번 고민만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었다. 치아 교정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한 얼굴 사진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보기도 흉한 보철기구를 끼고 몇년간을 불편하게 보내야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대신 지난 번 상담받았을 때 시작했으면 벌써 끝났을 세월이다. 심지어 그동안 투명교정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서 웬만한 부정교합은 보철없이 투명교정 장치로 가능하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한 번 더 고민했다가는 환갑이 되도록 후회할 판이었다. 늦은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지 투명 교정 범위가 넓어지기도 했고 교정 비용도 전에 비해서는 합리적이라 눈 딱 감고 시작해버렸다. 하지만 내 결심과 무관하게 교정장치를 받기까지 2주 정도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막상 시작을 했는데도 실감이 안 나는 기간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머리를 잘랐다.


그렇게 점점 나도 모르게 빈 시간을 촘촘하게 채웠다.

아이들 픽업가기 전까지 비어있는 오전 시간을 주3회 운동, 주1회 한의원, 치과, 미용실, 네일숍, 왁싱숍,... 빠듯하게 채워 넣었다. 몇 주 지나자 운동덕분인지 얼굴에 생기가 돌고 몸이 가벼웠다 .여유가 생기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던 욕심은 그렇게 단기간 내에 채워지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 놀러와요.

스쿼시 레슨을 같이 듣는 수강생과 인사를 나누다가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털털한 말투가 호감이 가는 언니였는데 나는 어이없게도 그녀의 초대에 흔쾌히 응할 수가 없었다. 너무 바빴다. 오후엔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운동없는 날에도 매일 뭔가 할 할일들이 있어서 결국 본의 아니게 도도한 척하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 '죄송해요, 제가 시간 조정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나는 늘 일에 파묻혀 사느라 이해관계없는 순수한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 고 생각했다. 여유시간만 생기면 소원했던 대학 동기들도 만나고 동네 친구도 만들어야지. 한창 바쁠 때는 그저 조용히 차 한잔 마시면서 멍때리는 시간 30분이 간절했다.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잡다한 생각들에 집중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하루를 보내봐야지.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잘 짜여진 시간표대로 사느라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운동은 핑계고

작년 여름 28년간 실험실에 갇혀 살다 자유를 찾은 침팬지의 영상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태어나 처음 본 하늘을 올려다 보며 감동하는 침팬지의 얼굴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영상속에서 침팬지는 그를 가두었던 철문이 열린 후에도 쉽게 밖으로 나오지 못 하고 망설인다. 사방 1.5m짜리 우리에서 갇혀 지내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열린 공간의 자유가 낯설다는 듯이. 그리고 용기내어 밖으로 나와서도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재확인했다. 마치 지금 내가 이 비어있는 시간 동안 진짜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게 맞는지 연신 확인하듯이. 오전 11시에 운동 중이어도 나를 찾는 전화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듯이. 그리고 운동이 끝난 후 바로 치과에 가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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