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 구경과 신상 브런치 카페를 털고 다니는 것 외에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일은 셀카 찍기이다. 내 돈 주고 산 내 휴대전화 사진첩 속 5,283장의 사진 중 제대로 된 내 사진은 한 장도 없다는 사실이 약간 슬프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거의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운전대에 앉아 신호가 걸릴 때마다 각종 카메라 어플로 셀카를 찍는데 뒤차가 일깨워 줄 때까지 신호대기를 즐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카메라 애플리케이션 필터가 어찌나 좋은지 필터 쓴 내 얼굴은 10년 전 보정 떡칠한 웨딩앨범 속 얼굴보다도 더 젊고 예쁘다. 한 20년 전쯤부터 꾸준히 고급 스파와 피부과를 오가면서 매일 아침 전문 메이크업을 받는 여자 얼굴로 만들어주는데 배응망덕한 아이폰 카메라 보다 백배는 사진찍을 맛이 난다.
사실 일하는 동안은 아무리 바빠도 외모를 가꾸는 일에 소홀한 적이 별로 없다. 일에서 이미지는 꽤 중요한 부분이어서 머리가 엉망이거나 네일이 망가져 있으면 어떤 면에서는 게을러 보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똥은 참아도 네일숍은 참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흘러넘치니 묘하게 외모 가꾸는 일에 시간을 쓰기가 어쩐지 아깝게 느껴졌다. 아니면 최소한의 양심인지 셀프 죄책감 회피 방편인지 모르겠다.
"왁싱숍 언니랑은 못 할 말이 없어."
5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고도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못다 한 말을 반드시 해야 하는 사이로 서로의 인생을 거의 라이브 중계하다시피 하는 절친 B가 말했다. 마치 게이 남친을 가진 노처녀가 뽐내듯이 말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작은 방안에서 단 둘이 소리 지르고 눈물 훔치면서 못 할 말이 없다고 덧붙이는데 그 장면이 상상되자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은밀하고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는 공적인 관계라니 너무 매력젹이잖아. 당장 근처 왁싱숍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적인 사생활을 공유할 '왁싱숍 언니'를 그야말로 매우 신중하게 찾기 시작했다. 실제로 네일숍이나 미용실같은 곳은 한번 발을 들이면 중간에 옮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중해야한다. 다음은 내가 고려한 몇 가지 조건이다.
1. 집에서 가까울 것. 한 번 시작하면 주기적으로 다녀야 하므로 일부러 시간 내지 않고 오가는 길에 갈 수 있도록
2. 주차하기 쉬울 것. 주차가 어려운 곳은 가기 전부터 이미 스트레스가 올라오니까.
3. 대로변, 건물 외관이 깔끔할 것. 밤에 가게 될지도 모르고, 혼자 가야 하는데 누가 잡아갈까 걱정되니까(?)
4. 전화없이 문자나 모바일로 예약이 가능한 곳. 웬만하면 불필요한 접촉을 최소화 하고 싶어서.
5. 밝고 심플한 인테리어. 이건 개인 취향이지만 동시에 위생관리를 잘할 것만 같아서.
6. 친절한 리셉션. 당연한 일 같지만 뷰티업체들은 대체로 개인이 고객을 관리하는 방식이어서 의외로 리셉션이 불친절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리셉션이 불친절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속된 말로 시작도 전에 기분이 잡친다.
초록창의 도움으로 집 주변 왁싱숍 페이지들을 띄워놓고 사진들을 열어보고 후기를 꼼꼼히 읽었다. 여자들은 감옥에서도 서로 돕는다더니 이 은밀하고 사적인 경험을 고상하게 고백한 왁싱 선배들에게 동지애마저 느꼈다.
그리고 상세한 자료 조사와 계획으로 완벽하게 예상가능한 일정을 시작하는 안정감을 느끼며 대로변에서 바로 연결되는 주차장에 기분 좋게 차를 대고 내리자 마자 압뿔사. 주차장 경비초소에서 남자가 나오더니 어디에 왔느냐고 물었다. 망했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올 때 주차권을 챙겨오라고 말했지만 나는 주차권에 상호명이 나오는 도장을 찍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차비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왁싱숍 찾기 조건에 7번을 추가 ‘상호명으로 업종을 알 수 없는 곳!‘
건물의 야외 테라스에 연결된 독립매장이어서 진입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속세를 떠나 신성한 그곳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그 이후 프로세스는 예상대로 흘렀다. 동지들의 후기대로 리셉션도 친절했고 대기 공간도 깨끗했다. 첫 아기를 낳기 위해 산부인과에 갔을 때도 못 받아본 배려에 마음이 노곤해졌다. 마사지숍 1인실과 비슷한 크기의 방에 간이 샤워실을 갖춘 것도 아주 사려깊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명랑하게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요가음악처럼 속삭이듯 말하는 바람에 나도 조신하게 인사하고 입을 닫고 말았다. 나는 누가 봐도 다정한 인상은 아니고 속생각이 많아 겉으로 드러나는 리액션도 별로 없어서 그녀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리는 시술이 끝날 때까지 완벽하게 공적인 시간을 가졌다. 다독이는 그녀의 손길이 매우 능숙하고 다정했기 때문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못 할말이 없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첫 경험은 그렇게 실망스럽게(?) 끝났지만 브라질리언으로 새로 태어난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살빠진 기분이랄까. 어쨌든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남모를 만족감으로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주차장 남자에게 확인 도장이 찍힌 주차권을 내밀면서 업소명이 찍혔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브라질리언이니까.
여담이지만 나의 반려인에 따르면 아주 괴상하게도 남자들은 남자 왁싱사보다는 여자가 낫다고 했다.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리냐 했더니 순수하게 남자가 몸에 손을 데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왓 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