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두고 시작한 것들 중 시간과 노력을 가장 많이 요하는 것은 단연 치아 교정이다. 아마 치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지만 두 달에 한번 치아를 스캔하고 주기적인 충치 치료, 스케일링 등으로 거의 매주 치과에 가다 보니 태생적인 두려움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 게다가 담당 치과 선생님이 어찌나 다정하신지 언제나 지난 주 치료 후에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안부를 물으며 진료를 시작한다. 그리고 의자에 누워 얼굴을 가리면 나긋한 목소리가 열번쯤 계속된다. '자, 아- 해보세요.'
요즘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결혼할 때 치과 의사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안정적 수입에 직업이 주는 신뢰감에 더불어 치과의사는 응급수술로 새벽에 뛰어나갈 걱정도 없으니까. 그런데 나이들고 보니 그렇다. 하루에 이백번쯤 같은 말을 하면서 일년 내내 같은 일을 하는 전문직 종사자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의사만큼 불행한 직업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평생 앉아서 공부만 만하던 사람이 어느날부터 매일 낮선사람을, 그것도 아픈사람을 대면해야한다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이유에서였다. 4년 전인 2020년 대한의사협회에서 진료 실태를 조사했는데 대한민국 의사는 하루평균 3-40명의 외래 환자를 보고 3-4건의 수술이 배정된다고 하니 그들의 하루도 알만하다. 종합병원에서 모닝컨퍼런스라고 부르는 아침회의는 보통 7시 이전이다. 직업상 의료관련 파트너사와 일하게 되면 모닝 컨퍼런스 시간에 맞추어 프로모션 자료를 보내거나 그 시간 라운드테이블을 운영하는 일이 있는데 전날 저녁 마지막 타임 수술을 끝내고도 새벽에 차를 몰아 미팅에 참석하고 심지어 발표도 한다. 신입 직원들은 호화로운 호텔에서 조찬모임을 하고 주말이면 만찬 세미나를 하는 의사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9시가 다되어 가는 시각에 응급수술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보면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케팅 대행사라고 하면 다들 일이 고되겠다고 한다. 광고 대행사 못지 않은 경쟁 속에서 다양한 고객의 니즈에 맞추어 매순간 새로운 아이디어를 쥐어짜는 직업이다. 아이디어가 밥줄이다 보니 한 시도 일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3년을 못 버티고 퇴사하는 직원들은 대부분이다. 그들은 도태되는 것 같고 스스로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진로가 고민된다는 핑계로 사직서를 내밀었다. 어떤 직원은 일을 쉬면서 영어공부를 더 하겠다고 했고 어떤 이는 프로그래밍을 배워보겠다고 했다. 취미로 하던 사진을 본격적으로 하겠다거나 네일아트를 배워서 개인샵을 내겠다고 한 이도 있었다. 개인을 너무 소진하는 직업이다 보니 오히려 단조로워 보이는 분야로 눈을 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장이랍시고 앉아있는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이 밝도록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아질 수록 씁쓸한 생각들로 회의감에 젖었다. 회사를 꾸린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대리 때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맞나 싶었다. 이렇게 발전없는 삶이 또 있나, 계속해도 되는 것인가, 실패한 삶인가, 우울감 마저 들었었다. 겉보기에 번지르하게 명품백들고 외제차 끌고 출근하는데 앉아서 하는 일은 10년 전부터 똑같다.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말라고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치과의사나 나나 별 차이 없는 인생인데 세상사람 대부분이 치과의사는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면 실망스러운 내 삶도 누군가의 눈에는 그럴 듯 해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의 외과의사 이국종님은 사명감때문에 빛이 나고 반백살 가까이된 이효리는 아이돌 중의 아이돌이다. 누구나 어제와 같은 오늘에 헌신한다. 그리고 나의 매일을 바치는 일에 진심이기까지 하면, 어쩌면 위대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근 일상을 곱씹으며 배운 것이 있는데 여유를 가지고 예의를 다 해 순간을 대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 다는 점이다. 원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집안 일은 빨래 정리인데 곤도마리에 상처럼 무릎을 단아하게 꿇지는 않지만 최대한 단정하게 정성과 시간을 들여 빨래를 정리하면 그 시간이 전혀 싫지 않다. 오히려 표현하기 어려운 만족감을 얻는다. 작은 명상처럼 아이 잠옷의 소매단을 매만지며 아이가 참 많이 컸구나 생각하고 아이 손목을 쓰다듬듯이 소매단을 곱게 펴서 주름을 펴준다. 마치 나의 친애하는 치과 담당의가 잊지 않고 안부인사를 건네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하듯이.
자, 이제 아- 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