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의 유통기한
점심을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오전에 손데지 못한 일들을 정리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난 주부터 김대리에게 지시해 놓은 일이 아직도 펜딩 중이었다. 시스템상 펜딩으로 뜨는 건지 실제로 김대리가 일을 마무리 하지 않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직접 물어보면 바로 알 일이긴 하지만 영은에게 은근한 반감이 있는 김대리는 언제나 조금 삐딱했기 때문에 상사로서는 다루기 까다로운 직원이었다. 영은보다 나이도 많고 결혼도 일찍해서 아이가 있어서인지 겉보기에도 영은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이긴 했다. 반면 영은은 석사를 마치고 경력직으로 입사해 김대리보다 직급이 높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김대리보다 서툴었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관계를 맺고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잼뱅이였다. 아마 그 부분이 영은이 유학을 고민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선입견이 없는 외국인들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다 보니 적어도 학위 하나쯤은 외국에서 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직 점심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김대리와 대화할 것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김대리님, 지난 주 건 결과보고가 아직 안 올라와 있던데 얼마나 더 걸려…요…?”
영은이 하루종일 벼르다가 겨우 입을 떼었지만 김대리는 영은의 말에 눈도 안 돌리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김대리님! 어디 가세요? 제가 말 하는 중이었잖아요?”
“퇴근 시간이라서요.”
영은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불러세웠지만 큰 키로 내려다보며 한마디 내뱉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가버렸다. 더이상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퇴근시간이라고?’
직장인의 가장 큰 무기는 근무시간과 업무스콥이다. 근무시간이 아니면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없고 업무스콥이 아니면 업무에 포함시킬 수 없다. 영은은 이런 무책임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럼 남겨진 일은 누가, 언제해야할까. 영은은 한숨을 쉬었다. 내일도 어짜피 김대리는 보고서를 건드리지도 않을 것이다. 마땅한 핑계가 있겠지. 영은이 리드한 실험도 아니고, 결과도 애매하지만 보고서는 영은의 몫이었다.
언제 퇴근해?
금방 끝낼 것 같았던 일이 계속 늘어졌다. 시스템을 뒤져 1차 결과를 찾고, 2차, 3차를 비교하다가 다시 결론을 수정해야 했다. 도무지 일관성없는 실험설계가 보고도 없이 수정된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다음주에는 보고 해야하는데 이대로면 재실험할 시간도 없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미안.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어떻게는 오늘 정리를 해서 내일부터라도 한번 더 최종 점검을 해야한다.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엄마도 모시러 가기로 했는데 자꾸 늦어지니 조바심이 나서 속이 타들어갔다. 그 마음을 아는지 남편은 재촉하지 않았다. 열한시가 넘어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나 너무너무 무서워. 히잉.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고. 손이 벌벌 떨리고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허엉엉.”
엄마가 아이처럼 울었다. 영은은 모두 자기 탓이라고 곧 데리러 갈테니 물이라도 따끈하게 한잔 하며 기다리라고 타이른다.
“물뜨러도 못 가. 너무 너무 무서워. 이불 한장 깔아두고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떼겠어. 하루종일 화장실도 못 가고 있어. 허엉엉. 쓰읍, 니 아빠는 나만 두고 가버리고 딸년들은 들여다 보지도 않고…. 허어어엉 ”
엄마는 울다 지쳐 악에 받친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영은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지금 가는 중이야. 일이 늦게 끝나서 미안해. 3-40분이면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마음이 조급해졌다. 엘리베이터가 오늘따라 한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걸어내려가는 게 빠르려나 잠시 생각하다가 말았다. 하루 종일 커피만 마셔대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뛰다 시피 걸어서 지하 주차장에 닿았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자기 많이 늦어? 오늘 어머님 모시러는 못 가겠네.”
출퇴근을 같이 하는 남편은 영은의 퇴근이 늦어지면서 강제 야근중이었다.
“아니, 이제 가려고. 엄마 거기서 못 주무셔. 지금 가야할 것 같아.”
“그래, 그럴 수 있지. 나 준비하고 내려가서 기다릴게. 천천히 와.”
“당신 피곤할텐데 집에 내려주고 갈까? 내일 출근하려면 너무 힘들잖아.”
“아니아니, 괜찮아. 어짜피 자기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릴텐데 같이 다녀오는 게 낫지.”
남편의 느긋한 목소리가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5분 거리의 남편 회사앞에 차를 댔다. 빙긋이 웃으며 차를 반기는 그의 의연함은 언제나 영은을 안정시켰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루틴처럼 차에 타자 마자 꼭 안아주며 서로에게 격려의 말을 한다.
“저녁은 먹었어?”
“응, 난 회사 밥 먹었지. 자기는? 김대리한테 말 했어?”
“아, 그게…”
남편의 다정함에 오늘의 서러움이 복받쳐 숨을 들이키는 순간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오지마. 늦었잖아. 밤 운전하지 말고 내일 와.”
엄마가 여전히 훌쩍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못 있겠다며. 무서워서 어떻게 잘려고 그래요. 지금 나왔어. 금방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아니, 그래도 밤이 너무 늦었는데 내일 출근도 해야되고 힘들잖아. 오늘은 내가 참아볼게.”
“내일 가도 밤에 가야해. 일찍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엄마 화장실도 못 가고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자. 조금만 기다려요. 곧 가.”
영은 옆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며 전화 내용을 모두 듣고 있던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힘드신가보다. 내가 운전할까?”
영은은 순순히 보조석에 앉았다. 순식간에 온 몸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30분 후면 영은이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 아빠와 부비적거리며 살던 다세대 주택에 도착한다. 매일 아침 학교에 늦은 영은을 불러세워 노란 노른자가 흘러내리는 수란에 소금을 솔솔뿌려 한 숟가락만 먹고 가라고 입에 떠 넣어주는 아빠가 있던 곳. 그리고 이젠 없는 곳.
영은은 그 집에서 악을 쓰며 우는 엄마를 달래면서 계단을 내려와야 한다. 그러면 다시 30분 후 평화로운 은영의 신혼집에 엄마가 똬리를 틀고 마음껏 슬픔과 노여움을 풀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