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우웅… 탁,하고 풀리는 커피머신소리

장녀의 유통기한

by 안이온

정은은 연이틀 불도 켜지 않은 집에서 배달시킨 죽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버텼다. 몇 번 더 토한 것도 같았다. 왼쪽귀는 여전히 먹먹했지만 그래도 어지러움증은 확연히 좋아진 것 같았다. 이틀쯤 더 지나자 빠르게 걷거나 자세를 급격히 바꾸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살만했다.


“사장님, 죄송해요. 오늘은 좀 나은데 그래도 차를 타고 이동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급한 일 있으면 집에서 처리해도 될까요?”


정은이 쉰목소리로 사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수화기 너머로 사장의 난감한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어, 이팀장 미안해. 몸 안 좋은 것 아는데, 이대리도 나가고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급한 것들이라도 오늘 처리를 해줘야할 것 같아.”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제가 보고 처리 할게요.”


사장 입장도 이해가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팀단위로 운영되는 프로젝트를 핸들링하던 실무자와 리더가 빠졌으니 프로젝트 전체가 흔들리고 이런 문제는 곧잘 회사 전체의 신용과도 직결된다. 정은은 침대에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기대 앉아서 노트북을 펼쳤다.


읽지않은 메일 192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타인의 근면함에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는 몇몇 사소한 독촉 메일로 시작되었다가 허술한 신입의 회신이 오가고, 몇 번의 지적과 불평섞인 시정요구가 이어졌다. 그리고 장문의 정식 문제제기 메일, 그리고 해결방안에 대한 요구로 끝이 났고 마지막엔 사장이 사과하고 몇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첫째, 검증된 담당자가 곧 복귀할 것이며, 둘째, 이 프로젝트에 대한 기획료를 전면 삭감하고, 셋째, 현안에 대한 전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기획료 전면 삭감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기획료는 기획팀인 정은을 정조준한 조치였다. 교묘하게 정은의 업무 능력을 탓하면서 회사는 한발 빠지는 수법이다. 게다가 결국 이 사태를 수습해야할 정은은 어떤 수고비도 청구하지 못 한 채 마치 벌을 받듯 저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다음 메일은 지금 보지 않는 것이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런 일로 문제제기를 했다가는 또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둣 쓸데없는 곤조라는 둥 하며 사회 부적응자 취급을 할테니 어찌 대응할 방법도 없다.


천천히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내렸다. 1인 가구의 최대 사치인 캡슐 커피 머신은 정은의 보물 1호이다. 하루종일 한잔도 못 마시는 날도 많지만 이런 날 덜덜거리는 커피 머신 소리가 원룸을 가득채우면 왠지모를 위안이 되었다. 정은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대신해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딸깍하고 캡슐에 구멍이 나는 소리,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커피잔이 2/3쯤 차서 커피머신의 압력이 풀리고, 마치 생맥주 한 잔을 숨도 안 쉬고 단숨에 들이키고 시원하게 숨을 내뱉는 듯한 소리를 내면 가슴속에 꽉 막현던 어떤 것이 ‘탁’ 소리를 내면서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잔을 들고 머신 몸통에 튄 커피 얼룩을 닦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까만 물이 일렁거렸다.


“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큰 숨을 내쉬고 습관처럼 중얼거리며 식탁에 앉았다.


언니, 좀 괜찮아?

나 오늘 법무사 만나고 왔는데

우리 상속포기 절차 준비 해야될 것 같아.

필요한 서류 보내주면 준비해줄 수 있어?


지긋지긋했다. 또 뭐가 남았을까. 캡쳐된 이미지가 계속 이어졌다. 법무사와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있는대로 캡쳐해서 보냈다. 언제나처럼. 그럼 정은이 하나하나 읽어보고 내용을 파악해서 다음 액션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휴대폰 속의 작은 캡쳐화면의 더 작은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영은이 먼저 알아보고 일을 진척을 시켜놓은 것만으로도 대견했지만 사실은 불안했다. 문자를 하나하나 읽는 순간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다시 정은의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모든 책임을 동생에게 미루기로 했다.


「언제까지?」

「다음주 월요일」


역시, 오늘은 목요일이고 관공서에 직접 가서 떼어와야 하는 서류도 있는데 월요일까지라.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직장인이 시간내어서 법무사도 만나고 왔다 갔다 했을테니. 그것만으로 큰 일 했다 생각해주기로 했다. 게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주에는 눈치껏 재택근무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모처럼 강제로 주어진 휴식도 온전히 정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다.


그래. 고마워


쉬운 일부터. 그게 정은이 일하는 방식이다. 쉽고 간단한 일부터 처리했다. 일단 정부24에서 영은이 부탁한 온라인 서류를 발급받고 회사 내부 부서에 업무 협조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본인 주민등록 초본.


4장이나되는 38세 정은의 주민등록등본. 어린 시절 정은은 모두가 이렇게 이사를 자주 하는 줄 알았다. 2년쯤 살면 누구나 동네를 버리고 떠나서 새로운 학교에 가서 전학생이 되고 새 친구들과 부딪히며 어른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입사 서류를 내면서 다른 직원들보다 두툼한 서류뭉치의 대부분이 주민등록초본 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길고 복잡한 주소 리스트가 인생의 굴곡을 보여주는 나이테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짤막한 초본을 낸 친구들은 안정되고 고지식한 경우가 많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한 집에서 보냈다는 이들도 있었고 전학이 학창시절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정은은 콧웃음을 겨우 참았다.


서류를 C드라이브에 저장하고 다음 서류를 검색했다. 기본증명서. 무슨 서류 이름이 기본증명서람.


본인 이정은 …… 상세내용: 기록할 사항이 없습니다…..


정은은 개명을 하거나 국적을 바꾸고, 혼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에서는 기록할 사항이 없는가 보다. 행정부가 신경쓸만한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투명인간들처럼 살아온 38세 여성. 이정은. 거창하게 기념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 사람을 확인 받는 ‘기본증명서’에 ‘_이정은’이라는 파일명을 달아 저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가족관계증명서를 타이핑했다.


본인 이정은(李整恩) 1988년 9월 10일…

부 이상구(李尙九)『사망』1955년 4월 7일….

모 김정순(金貞淑) 1954년 11월 18일…

제 이영은(李英恩) 1991년 7월 30일…


정은 본인을 기준으로 아래 나열된 가족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했다. 정할 정(整)), 은혜 은(恩). 흐트러짐이 없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 그리고 부친의 이름 석자 옆에 무심하게 적힌 두 글자로 사망사실이 표기 되었다. 사람이 순하디 순해서 평생을 욕심 한번 제대로 부린 적이 없다가 결국 10을 채우지 못하고 떠난 이상九 씨. 인쇄체로 보아도 가엾게 늘어진 九자가 처연해보였다.


엄마가 결혼할 즈음에는 말띠 여자는 기가 세서 남편을 잡아 먹는다고 수근거렸다고 했다. 게다가 한살 연상인 엄마는 시어머니 눈에 가당치도 않은 며느리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은은 어린 시절 친할머니와 살갑게 지낸 추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꽤 오랜 세월동안 엄마, 아버지 그리고 동생이 그녀가 체감하는 가족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사망’꼬리표를 달았다. 이제 정은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공식적으로 엄마 정순씨와 동생 영은만이 남았다.


길지 않은 세월동안 물리적으로 옮겨다닌 주소지만 4장을 뽑았는데 ‘기본 증명서’는 ‘기록할 것이 없다’고 하고 ‘가족증명서’는 정은의 이름을 별도의 네모 박스에 넣어서 여백을 두고 아래 줄줄이 달린 가족들의 이름과 출생정보를 나열해 보여주었다. 그저 하얀 서류를 모니터 너머로 쳐다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촐한 네 식구. 이상구씨의 사망. 본인 ‘이정은’의 기본정보들이 질서 정연히 C드라이브에 담겼다.


주민등록초본_이정은.pdf

기본증명서_이정은.pdf

가족관계증명서_이정은.pdf


그리고 기계적으로 그 다음 일을 처리했다. 일신의 사정으로 프로젝트에 지장을 끼치게 되어 송구하고, 하기의 업무에 적극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을 기계처럼 반복하며 디자인팀과 재경부에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가장 먼저 디자인팀 손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달이나 계속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데 디자인팀과 사이가 틀어지면 시작도 하기 전에 일이 꼬인 것이나 다름없다.


“이대리가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마 최인애씨는 쉽지 않았나봐요. 진작에 제가 봐줬어야 되는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이팀장님 많이 아팠다면서요. 여러모로 일이 많았잖아요. 제가 이미 시안 몇개 작업 해뒀어요. 걱정마세요. 언제 출근해요?”


노처녀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친절하다. 정은은 이 사무치는 연대감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위기상황에 이렇게 너그럽지 않다. 직접적으로 자기 일이 아니어도, 자기 시간을 조금 손해보더라도 진심어린 사과와 부탁으로 의리가 살아난다.


“진짜 고마워요. 다음주에는 출근해야할 것 같아요. 월요일에 제가 커피 사갈께요!”


손과장은 그래도 목소리가 힘이 있어 다행이라며 다독거리며 쾌활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정은을 다시 현실세계로 끌어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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