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름은 고름일 뿐

글쓰기를 미루기를 미루기

by 윤경주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나니 다음 글을 쓰는 마음이 묘해졌다. 반쯤은 다음에도 그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되었고, 반쯤은 다음에는 얕은 밑천을 들키게 될까 두려웠다.

주어진 주제에 찰떡같이 들어맞는 소재보다는 지난주에 첫 글을 쓴 후 '써볼 수 있겠다'고 감을 잡은 소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또, 아빠에 대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시간을 출가한 아빠와 함께 보냈다.


동생은 입원하기도 전부터 시골에 가고 싶다고 했다.

원래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고, 우리 남매가 모두 초등학생일 때 다섯이 떠나온 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만 사셨던 집이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회의를 거쳐 집을 처분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에는 모두가 만족스러워했지만 이제는 아빠에게 가장 다행인 일이 되었다. 일 년 전 출가한 아빠는 그 집을 정성스럽게 고치고 꾸미고 가꿔 새롭게 정착했다.

동생이 시골에 가고 싶다고 성화를 부린 것은 아빠보다는 시바견 두 마리, 깜순이와 또랑이 때문이었다.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빠가 데려온 깜순이는 이전 반려인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새끼를 품고 있었다. 같이 태어난 형제들은 죽거나 다른 집으로 입양 가고, 단둘이 남은 또랑이는 자꾸만 엄마를 물고 간식을 뺏어 먹으며 괴롭혔다. 잠잠할 만하면 깽깽 싸워대는 소리에 말벌 아저씨처럼 뛰쳐나가야 했지만, 초봄의 선뜻한 시골 공기는 책을 읽기에도 글을 쓰기에도 최적의 환경이었다.


동생이 크게 아프고 난 후라 그런지 아빠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전에 없이 약한 소리, 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내가 늬들한테 잘해준 게 없는 거 안다. 좋은 아빠 아니었던 거 다 안다. 여기 와서 조용하니까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미안하다는 말도 늦었지만 미안하다. 나는 이제 바라는 것도 없다. 엄마한테 잘해라.

그런 소리를 듣고 난 뒤에는 글을 엮고 쓰는 속도가 더뎌졌다. 가장 오래 묵혔던 큰 고름을 짜서 깨끗하게 닦아내려고 하는데 그 애가 눈을 맞추고 나 때문에 너무 아팠지? 그동안 미안했어, 말하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네가 이렇게 미안해하는데 나는 너를 터뜨리고 깨끗하게 치워 버리려고 했구나. 너를 없애버리려고 했구나.

그럼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실상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물음이었다. 약해진 마음을 어렵지 않게 다잡았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될 소설 속의 장지석은 윤지석이 아니다. 고름은 고름일 뿐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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