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미루기를 미루기
지난 수업에서는 고칠 점이 많은 글을 내림차순으로 호명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수업 합평 시간에 내 이름이 가장 먼저 불린 순간,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아직 히터를 틀어야 하는 초봄에 한여름의 이야기를 적어서 분위기가 잘 묻지 않았나. 아무리 엽편이라도 너무 기승전결이 없는 내용인가. 가까운 인물을 투영한 티가 났나. 이름을 불린 찰나에 온갖 걱정이 머리를 스치는 한편 반가운 마음도 함께 치밀었다. 어떤 점이 부족한지, 앞으로 어떤 점을 의식하며 글쓰기에 임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너무너무.
이번에도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비를 목격한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오십을 넘게 살아도 처음 겪는 일이 있다는 것은 장지석에게 유쾌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첫 문단을 읽은 선생님은, 본인은 인간을 두 가지 부류로 본다고 하셨다. 고등학생 때 간 수학여행을 기억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 선생님은 세세한 타임테이블까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장면은 잘 기억한다며 느끼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생생하게 감각해야 했던 일화를 들려주셨다. 마흔을 넘게 살아도 처음 겪는 일이 있다는 게 유쾌한 본인으로서는, 자기가 계획하고 바란 것들이 생각대로 능숙하게 유지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와 그가 현재 처한 난감한 상황까지 한 번에 느끼게 된, 아주 잘 쓰는 작가가 쓴 도입이라고 짚어주셨다.
쓴 입맛을 누르려 담뱃불을 붙이려는 찰나에 쿵- 소리가 울렸다. 쥐고 있던 담배를 놓칠 만큼 커다란, 차라리 웅장하다는 수식이 적합할 소리였다. 벌목 할 때 나무 넘어가는 소리와 유사했지만 그보다 열 배는 컸다. 산 어디가 무너져 내렸나. 벼락이 쳤나. 우산도 쓰지 않고 마당까지 나가 보았지만 사위에 보이는 것은 오직 빗줄기뿐이었다. 안개보다 더 높은 밀도로 내리는 비를 얼마간 맞고 있자니 닿은 면적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쫄딱 젖은 꼴로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소리가 울렸다. 쿵- 이번에는 무언가 꺾이고 부서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가봤자 또 보이는 것 없이 젖기나 하겠지. 손에 잡히는 아무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으며 지석은 몸을 떨었다.
"경주님이 잘 활용했는데, 이런 소설은 초반에 뭔가 부서지고 시작해요. 이런 조건의 인물이 관계가 부서지거나, 직장이 부서지거나- 여태까지와 다른 경험을 하기 시작하면서 독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주인공이 부서지기 이전에는 본인과 다른 사람이었는데, 작가가 선택한 조건 안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그려지니까,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해요. 이런 장치는 소설의 마지막에 쓰면 안 돼요. 그럼 그냥 단순한 인과응보식 구조가 돼버려요. 무너지는 상태 자체가 주인공이 돼요. 사람이 주인공이 돼서 독자가 '나'라고 하는 공감대를 느끼려면, 뭐든 부서지는 건 소설의 초반에 나와줘야 해요. 아주 잘 쓴 장치예요."
본인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왜 오신 거냐고 물으신 선생님은 이번 원고도 단편으로 써서 완고를 해보라며 올 한 해 동안 여러 편을 쌓아두고 최대한 많은 공모에 내보는 기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피드백을 마치셨다.
엽편소설이란 것을 난생처음 쓴 지난 시간의 피드백에서는 의식하고 쓴 장치들에 대해 귀신같이 짚어주신 점이 신기했다면, 좀 더 내밀한 인물과 이야기를 후루룩 써버린 이번 글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해서도 어떤 역할로 작용하는지 짚어주셔서 신기했다.
이름을 불린 후의 바람처럼 어떤 점이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지만, 어떤 점을 의식해야 하는지는 답을 많이 얻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는 퇴사를 결심했을 때부터 벼르던 3박 4일 경주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기차라 빨리 짐을 싸고 자야 하는데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진이 빠져 드러누운 채로 수업 시간에 받은 피드백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가슴이 부푸는 것이 여행 때문인지, 글을 쓰고 읽고 나누는 행위의 화학작용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음 과제는 여행지에서 받아 여행지에서 쓰게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지역에서, 이번에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무사히 도착해 여행도 하고 과제도 하려면 이제는 정말 짐을 싸야 했다. 더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