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미루기를 미루기
5년 다닌 회사 동료들과 재직 중에 한 번, 그 회사를 퇴사한 후 혼자 한 번, 그리고 직전의 회사를 퇴사한 지금 한 번.
이번이 고작 세 번째 방문이지만, 경주는 고향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이 되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경주 시내에 도착하니 9시도 되지 않았다. 3월 말에 코트를 입고 왔는데도 바람이 거세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다시 나와 김밥 한 줄만 사 들고 버스를 탔다. 지난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스팟- 문무대왕릉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관광지를 가리키는 표지판들, 공사판, 차창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보문호수와 깊은 산세를 지나 꼬불꼬불하고 험한 시골길을 조금만 견디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주상절리부터 보기로 결심했다. 문무대왕릉보다 두 정거장 더 들어가 내리니 작은 항구마을이 나왔다. 주상절리를 거쳐 문무대왕릉까지 걸어갈 수 있는 둘레길의 시작점에 정자가 있다. 거기 앉아 금방이라도 덮쳐올 것 같은 거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우적우적 김밥을 씹었다. 식은 김밥에서는 외로움의 맛이 났지만 그런대로 삼킬 만했다.
오롯이 자연의 힘으로 생겼다기에는 대가가 공들인 역작 같은 주상절리가 끝나는 지점에는, 앉은 자리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카페가 두어 군데 있었다. 미리 찾아둔 카페 2층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오후 한두 시의 햇빛이 내려앉은 바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인지 밖에서와는 다르게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빈 노트를 펴두고 한참 동안 윤슬만 내려다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글쓰기에 대한 목표는 단 하나였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생각해 보기. 기왕 쓰기로 마음 먹었으니 지켜지지 않더라도 이정표라도 꽂고 시작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지. 읽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색으로 변했으면 하는지. 어떤 기분으로, 어떤 마음으로 쓰고 싶은지. 쓰다가 지치거나, 왜 써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 때 어떤 생각으로 다잡을지.
카페에서 문무대왕릉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멍때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전생에 문무대왕의 충신 아니면 어머니였을 거라고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가라앉았다. 깔고 앉을 거리가 마땅치 않아 제자리에 서서 한 시간이 넘도록 파도를 보고 들었다.
답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다.
경주 여행 마지막날, 나는 둘째 날부터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고민거리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관련한 사람들과, 고민을 나눌 만큼 믿는 사람들과 연락하며 해결할 마음을 다잡느라 가지고 온 생각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다음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당진에서 가족들과 합류하는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코스는 첫날 묵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추천해 준 경주골방이었다. 예약을 하고 방문하면 1인석에서 두 시간 동안 같은 시간대의 사람들이 신청한 노래를 함께 들으며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대화나 소음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어 얘기를 들은 직후 바로 예약했다.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두 시간여가 지나면 다시 숙소로 돌아와 영 싫은 얘기를 하기로 친구와 약속한 상태였다.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노트북과 책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숙소 바로 앞 골목이었다.
어두운 조도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음을 다해 고른 음악들과, 단 술과, 침묵뿐인 공간이었다. 도착한 순서대로 리클라이너 자리를 골랐다. 센터시네요, 거기가 제일 좋은 자리예요. 리클라이너 예약자 중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발밑 바구니에 겉옷과 가방과 노트북을 차곡차곡 쌓았다.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가 나왔다. 첫 곡은 내 신청곡은 아니었다. 인스타그램 디엠으로 술을 주문한 후 가장 먼저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방명록을 펴보았다.
압박감, 부담감에서부터 도망 와 경주의 따뜻함과 여유로움으로 인해 에너지를 받은 사람
잘 말고 그냥 살아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사람
'인생이 농담을 하면, 사람이 술을 마신다'라는 책의 한 구절을 적은 사람
고향을 떠나 경주에 첫 직장을 잡고 방문해 여행자들의 글을 읽으며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실감하는 사람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으로 대해서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긴 사람
아픈 사람들을 대해야 하기에 더 이상 무기력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며 마음의 불씨를 살리러 온 사람
며칠 동안 잠을 못 자 불쑥 여행을 떠나왔다가 행복은 내가 열심히 보내지 않아도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다고 느낀 사람
잘 살기 위해, 혹은 그냥 살기 위해, 마음을 다하기 위해, 혹은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방명록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위로를 느낀 공간의 집약이었다.
홀린 듯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펜을 들었다. 마음 가는 대로 써버릴까 하다가 펜은 내려두고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떤 말을 남겨야 이곳, 이 자리를 찾은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기분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자판을 두드렸다.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추리고 추린 몇 문장을 방명록에 옮겨 적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시 보니 글씨가 너무 못났다.
1.
비우려고 떠나와 놓고
또다시 그득 채워갑니다
비우는 것은 팔자가 아닌가 보다 합니다.
2.
하고 싶은 말을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을까 봐 두려워요.
어떤 글을 어떤 마음으로 쓰고 싶은지는커녕 얕게나마 고여있는 웅덩이의 물을 다 퍼내면 그대로 말라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두려운 마음만 찾았다.
쓴 마음으로 단 술을 한 모금 넘기고 노트북을 열었다.
다음 과제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