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미루기를 미루기
야심 차게 '모임 만들기' 버튼을 눌렀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택한 카테고리의 신규 모임에 노출되지도, 심지어 프로필 사진이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허망한 마음으로 수정 메뉴에 들락날락하다 보니 자꾸 거슬리는 문구가 있었다.
프리미엄 모임
너구나. 눌러보니 답이 나왔다. 소모임 개설은 30일의 무료 체험을 제공하고, 월 14,850원 연간으로는 148,500원의 구독료를 결제해야 '프리미엄 모임'을 만들 수 있었다. 무료 체험판에서는 책/글, 운동, 음악, 사교, 여행 등 카테고리를 클릭했을 때 내 모임이 노출되지도, 30분 동안 고민해 올린 프로필 사진이 뜨지도, 어플 내의 사용자를 초대할 수도, 모임 인원을 300명 이하로 제한할 수도 없었다.
월 14,850원을 결제한 후 마음이 맞을지 아닐지, 올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짧은 시간 고민한 끝에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른 소모임 어플들도 있고, 인스타그램도 있고, 오픈 카톡도 있고, 친구 몇을 꼬셔 진행할 수도 있으니 굳이 이 어플에 과한 소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찜찜한 마음으로 어플을 종료했다. 우선 수행은 했으니 투두리스트에서 '일기 쓰기 소모임 개설'에 형광펜을 칠했다.
모임을 개설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도 없고 카테고리에 노출되지도 않는 무료 체험판 모임은 '내 모임' 메뉴에만 묵묵히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모임 어플, 인스타그램, 오픈 카톡, 친구들에게 홍보할- 내가 고작 매일 5분의 시간도 통제하지 못해 사람을 모아 강제성을 부여하려고 기를 쓴다는 사실을 고래고래 떠들 타이밍이 돌아왔다. 이런 궁리 할 시간과 노력의 반이라도 들여서 혼자 일기를 써버리면 될 텐데. 하지만 생각대로 착착 성실하게 잘 쓸 거였으면 애초에 이럴 이유도 없다. 현타에 몸부림치느라 며칠의 시간이 더, 기록 없이 바스라졌다.
이름도 기록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까운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이왕 모임까지 만든 거 모임의 시작과 일기의 시작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아니 핑계의 힘이 더 강력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또다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미루기를 미루는 첫 과제인데 그걸 또 미뤄버린다면 이 기획은? 갈아엎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좀 아까운데? 언제 또 새로운 주제와 글감을 고민하고 얼개를 짜지?
이미 제껴둔 선택지에서 답을 찾았다.
사람들이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는 이유. 일, 편리하다. 이, 내 손으로 하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대신 해준다. 삼,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월 14,850원.
다른 커뮤니티나 잘 쓰지도 않는 인스타그램 발품 팔며 오픈 카톡 홍보할 것 없이, 친구들에게 머쓱하게 권유할 일 없이, 발제문만 읽어본다면 이마를 탁 치며 공감할- 분명히 존재할 사람들에게 이 모임을 알릴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
딱 한 달만 이용해 보자. 어차피 모임이 커지는 건 운영하는 입장으로서도 사양이고, 매일 일기를 쓰지 않으면 눈치 보이고 죄책감이 들게 할 정도의 규모만 필요한 거니까. 혹시 한 달 뒤에도 아무도 없으면...... 그럴 리는 없다. 없어야만 한다.
결제 후 어플에 다시 접속했다.
뜬다. 카테고리에 진입하자마자 신규모임으로 노출되고 있다. 스크롤을 내릴 필요도 없이 상단에 떠 있다. 고심해 골라서 더 허전했던 프로필 사진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모임을 클릭해 들어가니 무려 300명의 사용자에게 초대까지 할 수 있다.
사람은 이래서 돈을 쓴다.
프리미엄 모임 서비스 가입 후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새로운 유저가 가입했다. 랜선으로도 낯을 가리는 나이지만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 낯선 사람한테 먼저 인사하기 싫어요... 그래도 해야지 네가 모임장이잖아.
그가 가입한 날은 공휴일 전날이었다. 일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공휴일 다음 날 저녁부터 일기 인증-아니 자랑을 시작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사이에 몇 명이라도 더 가입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공휴일 다음 날 저녁, 바람이 무색하도록 단둘이 오붓하게 서로의 일기를 자랑하고 편안한 밤 보내라는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며칠 동안 성실하게 스티커로 가린 일기를 인증했다. 그동안 두세 명의 사용자가 가입과 탈퇴를 반복했다. 그래도 절망적이거나 괴롭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일기를 매일 쓰고 있으니까. 그게 몇 명이든 간에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와 같은 순간을 나누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프리미엄 모임 전환 일주일 경과, 세 명의 회원이 추가로 가입했다. 처음으로 가입해 준 회원은 오픈 카톡을 쓸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고 며칠간 어플 내 채팅으로만 자랑하더니 탈퇴 없이 잠수함을 탔다. 새로 가입한 회원 중 한 명은 나보다 더 빨리 새로운 사용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었고, 한 명은 일기 내용을 가리지도 않고 제일 먼저 자랑하는 회원이 되었다.
몇 명의 회원이 더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프리미엄 서비스 이용 기한이 종료되었다. 그동안 어플에서 자동 추천해 주는 300명을 매일매일 초대해 왔지만 회원 수는 아직 한 자리 대이다. 그러나 추가 결제를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어졌다. 나는 모임 시작 후 이틀을 제외하고 모든 날에 기록을 남겼고, 나보다 더 먼저, 나보다 더 꾸준히 일기를 자랑해 주는 작고 소중한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자세히 살피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늘 나타나던 시간에 일기를 자랑하지 않으면 내일은 올지를 걱정하고,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일기를 자랑하면 오늘은 많이 피곤하셨나보다, 추측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강제성뿐이었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미미한 온기가 따라왔다. 내가 느끼는 만큼의 온기가 그들에게도 기꺼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