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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Apr 13. 2024

첫 만남

서둘러 승강장을 향한다. 그녀가 탔음직한 버스가 조금 전 우리 차를 앞질러 터미널로 들어간 터다. 계획대로라면 먼저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를 환한 미소로 맞이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6시간이 꽉 차는 기나긴 여정은 순서를 살짝 꼬이게 만들었다. 더 일찍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1시 반에 일어나 아이가 먹고 싶다는 김밥을 싸야 했다. 내 체력이 닿는 한에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뭐라 첫인사를 건넬까, 나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떻까, 나에겐 또 어떤 모습으로 그들이 기억될까...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지금 어떨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며칠 전부터 이 순간을 위해 나름 예행연습 해왔을 테지만 터미널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생각으로 그녀는 작은 떨림을 느끼고 있을 게다. 오직 둘만의 관객뿐인 무대에 오르기 직전 배우처럼.



25년 전 어느 늦은 여름, 나 역시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지나 어느 낯선 집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그곳의 터줏대감이 내 옆을 든든히 지켜주었기에 그리 큰 걱정은 없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다소 부담스런 두 관객의 시선보다 작은 밥상에 차려진 음료와 과일이 더 또렷이 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큰 맥주 컵 가득 부어놓은 노란빛의 이온 음료와 두껍게 마구잡이로 썰어 놓은 수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색한 소품이었다. 평소 쳐다보지도 않던 그 음료를 꾸역꾸역 남김없이 다 마셔야 했고 차마 손이 가지 않는 수박을 마지못해 한 조각 들어 씨를 뱉어 가며 먹어야 했다.



"엄마, 훈련소 수료식 때 올 거지?"

"당연하지. 아들 수료식인데 엄마가 안 가면 어떡해. 꼭 가야지"

"그럼 올 때 인제 고속터미널에 들려서 내 여자친구도 태워서 와줘. 자기도 온다고 터미널에서 좀 태워 달라고 하는데"



아이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은 후 사실 반가움보단 걱정이 앞섰다. 아이의 이성 친구를 만나는 자리가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난 그리 외향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깊이 생각하고 말을 뱉는 편도 아니어서 괜한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가급적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 아님 달리 말할 사람도 없다. 말수가 적은 남편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혼을 생각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젠 둘 다 대학도 졸업한 마당에 그녀나 나나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사이다. 이래저래 남편과 나 역시 그 자리가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걸로 치자면 그녀가 우리보다 몇 배는 더 할 것이다. 혼자서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할 그녀가 안쓰러운 한편 대단하다 싶기도 하다. 예전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요즘 세대들은 훨씬 당당하고 용감하다. 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기껏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무대에 올랐는데 관객이 아무도 없어 살짝 김샜을지도 모른다. 승강장을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해진다.



1년 전 아이의 졸업 연주회에서 아주 잠깐 스쳐 본 적이 있다. 인사를 나눌 줄 알고 내심 기대하고 있던 남편은 아이와 사진만 찍고는 부끄러워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강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리 평범한 얼굴도 아니기에 알아보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인제행 손님을 모두 내린 후 속초로 출발한 버스의 뒷자락에 한 아가씨가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긴 머리에 옆모습이 모두 가리어진 상태지만 한적한 터미널 탓에 그녀임을 확신할 수 있다.



"언니는 그때 어떻게 첫인사를 나눴어요?"

며칠 전 가깝게 지내는 한 지인과 곧 있을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난 그냥 안아줬지"

지인의 활달한 성격으로 봐서는 충분히 그러했을 거라 싶다. 알고 보니 그녀의 큰 아들 역시 인제에서 군 생활을 했었고 터미널에서 아들의 여자 친구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후 같이 훈련소 수료식장을 향했단다. 하지만 그렇게 7년을 연애하더니 결국 결혼은 각자 따로 하더라며 못내 서운해한다. 이쁘고 싹싹한 서울 아가씨인데다 첫 정이라 지인이 무척 예뻐했었다. 다소 허탈해 보이는 지인의 얼굴엔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이란 말이 담긴 듯하다. 이내 표정을 고쳐 잡고는 헤어질 땐 부담스럽지 않게 차비 정도의 용돈을 꼭 챙겨줘란 말을 덧붙인다.



"먼저 도착하려 했는데 우리가 좀 늦었네요"

이름도 확인 않고 누군가 대뜸 말을 건네자 미처 큐사인을 받지 못한 그녀가 깜짝 놀란다. 만나면 꼭 안아주라는 지인의 조언은 아무래도 내겐 무리다. 그렇게 얼떨결에 인사를 나눈 후 수료식까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서둘러 차에 올랐다. 전날 비가 많이 내린 탓에 훈련소 운동장이 주차장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보다 가까운 인제 체육관으로 수료식장이 바뀐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훈련기간 내내 오늘 이 하루만 기다렸을 아이에겐 시곗바늘이 너무도 빨리 돌아가는 것만 같을 게다. 오전 내내 보았던 아이의 들뜬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훈련소로 다시 복귀할 시간이 다가오자 얼굴엔 짙은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훈련소 근처에 차를 주차해 두고는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남편과 난 차에서 내렸다. 하루 종일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마지막으로 가슴 아픈 뜨거운 안녕을 나눌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차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서 다소 엉뚱한 생각으로 혼자 웃음 지어 본다. 만약 지금 나와 그녀가 동시에 물에 빠진다면 아이는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까.



이젠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훈련소 정문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고 오늘 임무를 무사히 마친 세 사람은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 큰 일은 하나 끝났지만 내겐 아직 중요한 과제가 하나 더 남아있다. 8시 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위해 남은 두 시간 동안 같이 있어줘야 한다. 오전에도 한적한 그곳에 그녀 혼자 남겨둘  없고 우리와 정 반대 방향이라 태워줄 수도 없다. 버스 탈 때까지 같이 있어 주겠다 하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이도 없이 우리끼리 무슨 얘길 하며 그 시간을 보내야 하나 처음엔 살짝 걱정스럽긴 했다. 화개애해까진 아니더라도 어색한 분위기는 누구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 끊임없이 떠들어야 한다. 첫 만남부터 낯선 어른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건 그녀 입장에선 쉽지 않을 테니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그냥 아이의 친구 중 한 명이라 생각하고 주착스럽단 소릴 들을 것 감수한 채 최대한 수다를 많이 떨었다. 며칠 전부터 내게 협박을 받아왔던 남편 역시 평소답지 않게 열심히 대화에 끼어든 덕에 걱정과 달리 두 시간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를 태운 버스가 터미널을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후 차에 오르자 그제서야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밀려온다.



며칠 후 아이에게서 우리 부부와 함께였던 시간을 그녀가 꽤나 재밌어했다는 소릴 듣고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큰 숙제를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마무리 한 기분이랄까. 우리 부부 역시 그녀와 함께였던 시간들이 걱정과 달리 그리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버스에 오르기 전 나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준 차 선물도 그 안에 정성껏 쓰여진 손편지도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내 맘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인연으로 남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먼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준 고맙고 이쁜 그 마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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