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Oct 17. 2021

하리꼬미

가장 폭력적인 세탁기

하리꼬미(張り込み·はりこみ) [명사] 
1. 잠복. 장소에 대기하고 감시하는 것. (소학관 대사전)
2.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를 사회부 사건팀에 배치한 뒤 실시하는 업무 교육 과정.


    흔한 오해 하나. 앞서 잠깐 마와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기는 했지만, 마와리는 수습기자 시절에만 도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그램을 그려 보면 마와리는 모든 연차의 기자를 아우르는 취재 방식이고, 하리꼬미는 현장 중심형이라는 점에서 그와 교집합을 이룬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기자 사회에서 하리꼬미라고 하면 특정 시기, 그러니까 수습기자 시절 경찰서와 지구대, 파출소, 각종 집회·시위·기자회견 및 사건사고 현장을 돌아다니며 경찰서 2진 기자실에서 숙식하는 행위를 이른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이후로 여기서 숙식이 빠졌지만, 모든 현장에 수습기자를 보내는 전통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습 때 그린 그림. 간신히 얼어 죽지 않았다.

    사실 하리꼬미는 갓 기자 사회에 들어선 신입들을 하얗게 표백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것도 상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3~6개월까지, 수습기자들은 갑자기 '내던져진' 현장에서 자신이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강제로 얻어야만 한다. 간혹 "경찰은 사건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충고를 해 주는 1진도 있지만, 대부분의 1진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그저 수습기자들이 각기 배치된 라인 내의 경찰서에 한 명씩을 흩뿌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 있다가 보고해."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다. 담배를 세 대쯤 태우고 잔뜩 긴장해서 무작정 방문한 경찰서에서는 쫓겨나기 일쑤다. 바깥에 비바람이 몰아치든 땡볕이 내리쬐든 관계없다. 잔뜩 성이 난 얼굴, 귀찮은 벌레를 보듯 쏘아보는 눈초리 등에 수십 번씩 노출되다 보면 점점 나라는 존재가 작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 거기에 "너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 같은 말을 1진으로부터 밥 먹듯 들으며 자괴감에 휩싸이다 보면 정신줄을 온전히 붙들고 있기 쉽지 않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오랜만에 했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었다. '지금 문 열고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까?' 내게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던 1진 선배의 이름을 유서에 적고 경찰서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상상도 했다. 누군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접촉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수습기자들은 걱정을 하기 전에 으레 이런 부러움부터 탄식처럼 토해냈다. "와, 그러면 마와리 안 돌아도 되는 거야?" 하리꼬미 내내 머릿속을 꽉 채우던 끔찍한 발상들을 실천에 옮기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트랙에서 탈락하는 꼴만큼은 당하기 싫다는 오기였다.


    신입사원의 평균 '스펙'이 높아지는 것은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고, 사회가 요구하는 트랙을 착실히 밟은 결과 높은 '스펙'을 거머쥔 모범적인 사회 초년생들이 그런 종류의 냉대를 당하고 폭언을 듣는 일은 그전까지 별로 없다. 하루에 2시간여밖에 자지 못하는 것, 그래서 다음 경찰서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자마자 정신을 잃듯 곯아떨어지는 것, 택시비로만 한 달에 200만 원 돈을 쓰는 것, 씻을 시간이 없어 드라이샴푸를 온통 머리에 뿌리며 살충제를 맞는 모기의 기분을 느끼는 것, 담배 냄새와 체취에 쩌든 옷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 발에는 무좀이 생기고 물집이 잡히고 피부에 정체 모를 뾰루지가 오돌토돌 돋아나는 것, 그런 것들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습 때 그린 그림. 1진 선배의 불호령이 제일 무서웠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칼바람이 귀를 베어낼 것처럼 몹시도 추운 날, 현장에 투입된 지 딱 닷새째 되던 날 밤, 이태원파출소에서 쫓겨난 뒤 용산경찰서로 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 정말이지 서럽게 울었다. 제가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절 환영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벌레 보듯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면식도 없는 기사님이 날 경찰서로 실어다 주는 내내 온 얼굴에서 눈물 콧물을 짜내 가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서툴게 날 달래 주던 기사님은 용산경찰서 입구에 차를 세운 뒤, 택시비를 1만 원에서 5000원으로 깎아 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멋있는 기자님이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 이야기를 대신 말해 주는 기자님인데, 기자님이 이렇게 울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하리꼬미 내내 얼굴과 사명이 박힌 사원증을 부적처럼 목에 걸고 떼어 놓지 않았다. 그나마 수습들과 터놓고 지내던 1진 선배 한 명은 질색을 하면서 "제발 그 개목걸이 좀 떼어 놓고 다녀!"라고 타박했지만, 날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그 목걸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나를 1인분의 기자로 여기지 않더라도 나는 기자가 맞다는 것을 바깥에 알리는,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확인시키는 무익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종류의 모멸감을 한껏 느끼며 백지가 된 수습기자들에게는 기자 사회의 규범과 업무 방식이 차곡차곡 인쇄된다. 30년 차 기자와 1년 차 기자가 같은 소회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이 같은 교육 방식은 수십 년간 변하지 않았다. 취재 환경은 30년 전과 지금이 천지차이인데, 언제까지 이런 폭력적인 전통을 고수해야 할지는 회의적이다. 사실 그 전통을 깨부수지 못하고 기성 기자의 대열에 편입한 입장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내가 수습들을 돌릴 때 했던 일은 내가 1진에게 들었던 것과 같은 폭언을 하지 않는 것, 바깥에서 벌레 취급을 받고 왔을 수습들을 사람대접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나는 수년 뒤에도 계속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고, 수습기자 시절이 그렇게 고단하다더라는 풍문에 겁에 질린 수습기자들을 계속 맞아들일 것이다. 내가 그 친구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