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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17. 2021

하리꼬미·번외편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몇 주 전 구로경찰서에서 마지막 보고를 끝내고 났을 때의 일이다. 남성 민원인 둘이 들어와서 로비 근무자에게 이것저것 뭘 물어보더니 민원인실로 들어왔다.


    통상 '민원인을 뚫을' 때에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사람을 눈여겨본다. 하지만 그 둘은 별로 억울해 보이지도 않았고 특별한 얘기도 안 했던 것 같고 무엇보다도 술냄새가 나길래 가까이 가서 뭘 묻고 싶은 기분이 안 들었다. 게다가 특이사항이 있다고 다시 보고하면 못 잘 게 뻔하니까 그냥 못 본 척했다.


    민원인이 있든 말든 타사 수습과 '오늘 당직은 형사 3팀인데 진짜 문 안 열어준다', '1팀이나 2팀은 친절하고 좋은데 3팀이랑 4팀은 뭘 알려주지도 않고 대꾸도 안 한다' 따위의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리를 빤히 보던 민원인이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면서 웃었다.


    "와, <피노키오>랑 똑같다. 기자죠? 기자들은 진짜 이런 얘기 하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았기 때문에 웃으면서 대충 대답했다.


    "그래도 박신혜는 깨끗하고 예쁘잖아요. 저흰 잘 씻지도 못해요. 저도 사흘 동안 머리도 못 감고 아직도 못 자고 있어요."


    다들 이러고 살기 때문에 사실 이 정도는 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영등포는 정말 바쁘고 정신없는 라인이었기 때문에 자는 시간을 쪼개서 씻을 수조차 없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민원인은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돌아와서는 음료수를 세 개 뽑아서 하나는 저가 갖고 하나는 일행에게 주고 하나는 나한테 주었다. 극구 사양해도 음료수를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동생 같아서 그래요. 먹고 힘내요."


    그리고 내가 음료수를 받아 들자마자, 민원인은 일행과 같이 민원인실을 나가 버렸다.


    영등포에서는 출입서마다 참 골고루 물을 먹었고, 기껏 형사과장이나 수사과장, 혹은 담당 팀장 번호를 알아내도 추가 취재가 제대로 안 돼서 무지막지하게 깨졌고, 단독이 뜰 때마다 왜 나는 모르는 것들을 타사 수습들은 재주도 좋게 물어오나 싶어서 하루 종일 우울했다.


    그래도 사람이 많고 복닥거리는 만큼 이렇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일들도,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 안에서 자는 팀원들이 깰까 봐 들어갈 수가 없다며 새벽에 찾아온 나를 돌려보내지도 않고 문 앞에서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 주던 강서경찰서 강력3팀장님이라든가, 영등포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질문도 제대로 못 하고 허둥거리니까 곧 가슴을 칠 것처럼 답답해하면서도 날 앉혀놓고 차근차근 일대일 과외를 해주시던 영등포경찰서 교조3팀장님이라든가, 아침에 쭈뼛거리면서 찾아갔을 때 같이 담배 피우면서 다독여주던 구로경찰서 형사2팀 데스크라든가.


    마와리 2주 차까지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막다른 곳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는 생각 때문에 무척 괴로웠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의 의미를 알 수가 없고 막막하기만 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영등포라인 마지막 날 오후에야 깨달았다. 모든 것은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에서 끝난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게 되는 건 결국 내 잘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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