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타원의 궤도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를 도는 일

by 우리의 모든 순간

놀이터 나들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센 바람에 움츠러들던 모습과, 청소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던 아이가 연달아 떠올랐다.


‘생각보다 겁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간 따로 지내온 저녁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렸을 적의 나는 유난히 어둠을 무서워했다. 늦은 밤 문득 잠에서 깨면 이상하리만치 귀가 밝아져,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방의 불을 켜두고 다시 잠을 청하곤 했었다.


‘아마… 첫째도 무서워하지 않을까?’


아이와 가까워지려면 가장 먼저, 우리의 새벽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치 아주 작은 틈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묵직하게 욱신거리는 손목을 감싸 쥐고 아이를 안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바닥에 누워 아빠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둘째가 눈에 들어왔다. 품 안의 첫째를 내려놓으며 남편을 향해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다 같이 자자. 이제 둘째 새벽 수유도 많이 줄었잖아."

"그래? 좋지."


나는 자신의 발을 꼼지락거리며 텔레비전을 보던 둘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첫째를 다시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어느새 밤이 깊어지고, 침대 위에 둘째를 조심스레 눕혔다. 패밀리 침대처럼 나란히 붙여 둔 우리 부부의 킹사이즈 침대와 첫째의 슈퍼 싱글 침대.


나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 안 자?"

"음... 둘째가 몸부림이 좀 심한데. 내가 애들 사이에 누워야겠어."

“또 멀리서 자네. “


남편은 작게 투덜거리며 등을 돌려 누웠다.

나는 둘째를 남편 쪽으로 조금 밀어내고, 첫째와 둘째의 경계선 즈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좁은 슈퍼 싱글 침대에는 첫째와 내가, 그 옆 넓은 킹사이즈 침대에는 둘째와 남편이 누운 모양새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잠자리가 바뀌어서일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올 때쯤, 나는 첫째에게 다가가 작은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낮에는 그토록 완강하게 뿌리치던 손이, 내 온기 속에서 얌전히 머물러 있었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게… 이렇게 쉬운 건데."


깨어있는 세상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이 온기가 서글퍼, 나는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도, 우리의 놀이터 나들이는 이어졌다.

어젯밤에 느꼈던 서글픈 허무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매일 반복되는 거절에 지쳐버린 탓일까. 오늘따라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마치 숙제를 하듯, 어쩔 수 없는 의무감에 떠밀려 나온 참이었다.


전보다 한결 따스해진 날씨 탓인지, 놀이터 한편에는 삼삼오오 모여 모래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저 틈에 섞여 놀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나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아이들이 노는 모래사장 바로 뒤까지 유아차를 바짝 끌고 가 아이를 내려주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아이의 반응은 철저한 외면이었다. 내리자마자 또래 아이들이나 모래 쪽에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휙 하니 다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버렸다.


마치 텅 빈 벽에 대고 혼자 손을 흔든 것 같았다. 짙은 실망감과 헛헛함이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쓸고 지나갔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집스럽게 멀어지는 그 작은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기운 없는 발걸음을 떼어 그 뒤를 쫓아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이는 오늘도 여전히 같은 화단 턱에서 위태로운 오르내리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 이걸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혹시나 지치고 실망스러운 내 감정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꾹 삼켰다.

아이가 위태롭게 턱을 오르려 할 때마다 나는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올려 주었고, 두 발이 땅에 닿으면 다시 손을 놓아주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손길로 내 손을 밀어내는 아이와, 기어코 그 손을 다시 붙잡아 안전하게 올려주는 나.


그 후로도 매일 똑같은 화단 앞에서,

우리는 지독한 실랑이를 거듭했다.


그렇게 치열한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이가 화단을 오르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적이었다. 아이가 멈춰 서자 나도 숨을 죽인 채 걸음을 멈췄다. 화단의 흙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이의 둥근 어깨가 몇 번인가 작게 들썩였다.


그리고 이내.

아주 살며시, 허공을 가르고 내 쪽을 향해 작은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닿는 것이 두려운 듯 손끝이 살짝 둥글게 말려 있는, 아주 조심스럽고 투박한 손짓이었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온전히 나를 향해 뻗어온 그 작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이번 한 번만 믿어볼까?' 하며 아이가 내게 건네는 기적 같은 첫인사 같았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조용히,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거세게 밀려드는 벅찬 감정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억누르려 애썼던 뜨거운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번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단단하게 잡아줘야 해.'


나는 내 앞에 놓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아이가 턱을 무사히 딛고 올라설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그 걸음을 지켜주었다.


아이가 화단 위로 온전히 올라선 짧은 시간 뒤, 나는 아쉬운 마음을 꾹 누르며 붙잡았던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희망이라는 것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었다.

수십 번 밀쳐지고 거절당하는 그 지난한 시간 끝에, 스며드는 아주 작은 빛 같은 것이었다.


손을 놓아주자 아이는 다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짧은 온기가 머물렀던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멀어지는 그 작은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아이의 궤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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