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아침놀』을 시작하며 자신을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빛과 공기를 맛보지 못하면서도 한마디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왜 지하를 “뚫고, 들어가고, 파내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나. — 아마도 “이성의 햇빛”을 피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니체가 말하는 “이성의 햇빛”이란 “어두운 욕망들에 대항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합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본능과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는 것”(『우상의 황혼』)이다. 니체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의해 서구 역사에 뿌리를 내린 이러한 경향을 ‘데카당스(쇠퇴, 쇠락을 뜻함)’라고 규정한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이 ‘햇빛’(데카당스)은 너무 뜨거운 나머지 삶과 본능을 메마르게 하고, 개념을 ‘미라’로 바꾼다.(『우상의 황혼』, 「철학에서의 이성」) 그 결과, 세계는 황폐해진 ‘사막’이 된다.
또한 니체가 보기에 세계의 사막화에는 이성(철학)뿐만 아니라 종교(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청빈, 겸손, 순결)’도 큰 몫을 차지한다. “고통에 가장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그 자체로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목적이 제시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광범위하게 내려진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었다.” 뜻 모를 고통에 절규하는 욥의 노래가 이를 예증한다. “부르세요, 제가 당장 대답하죠, 아니라면 부를게요, 그때 대꾸하시기를. 저의 잘못 허물, 얼마만큼 되는지, 잘못 허물 제발 알게 하시지요.”
하지만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은 인류에게 하나의 의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 금욕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해석되었다.” (『도덕의 계보학』)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신]은 바로 예수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기 전, 사막에서 40일간 금욕 수행을 지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 테다. “[사제]를 추방하고 철저하게 굶겨서 사막으로 내쫓아야만 한다.”(『안티크리스트』, 「그리스도교 탄압법」 제5조)
세계를 사막으로 만드는 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니체는 우선 ‘지하인’이 돼야만 했을 수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몽상가가 그러했듯이. — “도대체 어디에서 모든 현인들은 인간에게는 어떤 정상적이고 선한 욕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얻었단 말인가? 도대체 왜 그들은 인간에게 항상 이성적으로 유익한 욕구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인간에게는 오직 자율적인 욕구만이, 이러한 욕구의 대가가 무엇이든 혹은 어디에 달하든지 간에 필요하다. 뭐, 욕구라는 것을, 제기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수기를 쓰는 데 그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몽상가’와 달리, 니체는 “ 자신이 [결국] 무엇에 도달하게 될지를 알고 있다.” 달리 말해, “자신의 아침, 자신의 구원, 자신의 아침놀에 도달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긴 암흑과 이해하기 어렵고 은폐되어 있으며 수수께끼 같은 일을 감수”하는 것이다.
수수께끼는 다음의 유명한 명제로부터 시작된다. — “신은 죽었다”
이를 외치는 ‘광인’이 두려움에 차서 말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즐거운 학문』)
광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태양(이성 혹은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인간을 감싼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른다. — 니체의 저작에서 아직 자신의 시대가 오지 않았다는 모티브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밤은 야행성 동물인 ‘부엉이’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부엉이는 바로 철학자 헤겔을 가리키는데, 그가 『법철학』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이 지나면 날개를 편다” —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시대를 사유로 포착할 것’을 과제로 부여받은 철학이 그것을 시작하는 때는 한 시대의 역사가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이라는 것. 이 무렵에 다다른 철학자만이 사태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헤겔의 생각에서 비롯된 문장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 ‘부엉이(헤겔의 철학)’는 신이 죽었다는 의미로서의 상징적인 밤과 무관하지 않다. “‘신은 하나의 정신이다.’라고 말한 자, 그는 지금껏 지상에서 무신앙에 이르는 가장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고 도약한 것이다.”
또한 이 부엉이의 ‘도약’은 예술을 향한 관심의 철회이기도 하다. 헤겔은 “예술이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철학에 정신 문제의 현안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철학적 관심의 종말을 선언한다: “예술의 형식은 정신의 최고 욕구로 존재하기를 그쳤다.” (···) “우리는 더 이상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며 “사상과 반성이 예술 너머로 날아올랐다”
바디우는 니체에 대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헤겔주의적 진행 방향에 반대하여, 19세기 초에 예술을 자유의 급진적 조건으로,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유의 독점적 조건으로 올려놓는 강력한 예술의 격상이 시작됩니다. 이는 특정한 독일 낭만주의가 나타낸 입장으로서, 확실히 쇼펜하우어에 의해 지속되었고 니체는 그 입장의 주요한 형상을 구성합니다.” — 이러한 니체의 입장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술, 오로지 예술.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있기에 진리로 인하여 죽지 않을 수 있다.”
신을 죽인occidre 사람들은 해가 지는 곳Occident(서양)에 있다. 그러므로 헤겔이 말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즉 철학은 황혼 녘에 서쪽(occident, 해가 지는 곳: 서양)으로 날아오르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니체에게는 반대로 예술이 새롭게 떠오르는(orient, 해가 뜨는 곳 : 동양) 장소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라틴어로 “오리리oriri는 나타나는 항성[태양]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타나는(oriri) 곳을 오리엔트orient[해가 뜨는 곳: 동양]라 부른다.” 이로부터 니체의 주요한 페르소나인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가 연원 한다. 디오니소스의 기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 있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를 기원으로 한다.
“나는 찾는 자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 나만의 태양을 창조하고 싶다.”
이 새로운 태양은 예술이라는 토대 위에서 새롭게 건축되는 반철학을 의미한다. 기존의 철학과 종교가 데카당스, 즉 삶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술은 삶[힘에의 의지]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술, 오직 예술만이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인데, 이는 다음의 사실에서 비롯된다 : “예술에서 인간이 즐기는 것은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또한 “아름다움에서 인간이 완전성의 척도로 정립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특별한 경우에 그는 아름다운 것을 찬탄할 때 실은 자기 자신을 찬탄한다. 이런 식으로만 인류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우상의 황혼』)
인류가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곳이 곧 ‘해가 뜨는 곳’이다. 그리고 이 ‘해가 뜨는 곳’을 새로운 인간 사유의 거점으로 가리키는 자가 바로 차라투스트라이다.
니체는 “인류가 최고의 자기 성찰을 행하는 순간”을 “위대한 정오”라고 말한다. ‘위대한 정오’란 “가장 짧게 그늘이 지는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정점. 차라투스트라의 등장「INCIPIT ZARATHUSTRA)”하는 순간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는 “이 순간 인류는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우연과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왜?’, ‘무슨 목적으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총체적으로 제기”한다.
孫潤祭, 2023.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