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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아 Dec 28. 2021

먼지 쌓인 글

유치원생이었던 내가 아버지 회사를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샀던 작은 공장이다. 그때 처음 타자기를  됐다. 아버지가 종이를 타자기에 끼워주시고는 내 이름을 눌러보라고 말씀하셨다.     


천천히 버튼을 꾹꾹 누르니 타자기가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누런 종이에는 내 이름이 적혀 나왔다. 물론 유치원생인 내가 한 번에 이름을 쓸 리 없었다.


나는 악하고 소리를 렀다. 아버지가 버튼을 누르자 실수로 썼던 글자들이 사라졌다. 그 당시 최신형 타자기였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과학적 원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타자기와 사랑에 빠졌다. 매일 어머니에게 아버지 회사에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에게 아침마다 회사에 같이 가자고 떼를 썼다. 머릿속에 오로지 타자기 생각뿐이었다.


나는 유치원도 남들보다 늦게 들어갔는데, 입학 당시 내 이름도 쓰지 못했다. 타자기를 만난 후엔 친구들에게 편지도 쓸 만큼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그렇게 글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허구한 날 공장에서 때를 새까맣게 타고 집에 돌아왔고, 어머니의 심기는 날이 갈수록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결국 타자기를 집으로 들고 오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할아버지의 창고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구석에서 먼지 쌓인 책더미를 발견했다. 책들은 정체모를 더러운 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마침 그 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책이 ‘페이지 마스터’였다. 책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듯했고, 그 순간 나에 책을 구해야만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역시나 부모님에게 졸라 책더미를 집에 가져왔다. 책 귀퉁이는 쥐가 갉아먹은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쥐가 종이도 먹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생떼를 써서 책더미를 들고 올 가치가 충분했다. 무려 세계 명작 전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최초로 가진 전집이다.   날 며칠 먼지를 털고 쥐똥을 닦았다.


가장 먼저 고른 책은 지킬 앤 하이드였다. 밤에는 지킬 앤 하이드를 들고 이불속에서 땀을 흘리며 읽었. 어머니 몰래 새벽까지 도둑 독서를 만끽했다.


옛날 책이라 한자도 많이 섞여 있었고, 각주도 각 장 마다 줄줄 달려있었다. 무엇보다 깨알 같은 글씨 덕에 시력 급격히 나빠졌다. 그래도 도둑 독서를 끊을 수 없었다.


 ‘지킬 앤 하이드’는 스릴 부분에서는 최고였다. 밤마다 등골이 서늘했고, 작은 소리에도 귀가 쫑긋해졌다. 지킬 앤 하이드와 관련된 일이라면 사족을 쓰지 않고 관심 갖게 됐고, 뮤지컬도 보게 됐다. 내 상상 속 하이드 씨보다는 주인공이 너무 미남이었다.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어지간한 책들은 내가 다 읽어봤던 것들이었고, 사람들 앞에서 아는 척 하기 참 좋았다.


나를 가장 많이 울렸던 것은 톨스토이이며, 눈을 감고 넓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헤밍웨이 덕분이다. 그렇게  세계는 넓혀졌다.


나는 학창 시절을 통틀어 수십 권의 일기를 썼다. 한자공부방에 가서 한자 배우는 것도 재밌었고, 과외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도 너무나 재밌었다.


가끔 잠들기 전 지킬 앤 하이드 씨가 떠오르곤 한다. 우연히 묵은 냄새를 마주칠 때면 쥐가 갉아먹은 책이 눈에 선하다. 서점에 가면 주석이 달린 책에한번 더 눈길이 가곤 한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게 글이 그립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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