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버섯 Oct 05. 2023

나의 시간, 엄마로서의 시간, 너의 시간

아침에 둘째를 유치원에 등원시키자마자 연희동으로 향했다.

연희동 담쟁이덩굴들이 가을에 익어갈 시간이다.

벽을 타고 탐스러울 덩굴들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늘 주차하던, 이제 주인도 나를 이해할 듯한 그 집의 담벼락에 주차를 해놓고서는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다녔다.


요즘 어디든 'OO리단길'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던데 그렇다면 여기는 연리단길이 되었을까?

네이버를 찾아보니 그렇단다. 이제는 여기가 연희동 뒷골목이 아니라 연리단길이다.

울릉도에 공항이 생기면 울릉도에도 '울리단 길'이 생길 거라던 티브이쇼의 연예인들의 농담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대한민국은 모두 '리단길'로 수렴되고 있다.


뭐라고 불리든 간에 담쟁이덩굴은 가을이다.

여름을 지나 청량한 빛이 사라진 조금씩 익어가는 담쟁이덩굴이 나는 참 좋다. 커피를 한잔 들고 할 일 없이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전기를 고치고 있는 아저씨를 만났고, 가게 앞을 청소하는 가게 주인들을 몇 만났다. 에어팟을 끼고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파마머리 청년을 보았고, 마을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타려는 할머니도 만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걸어 다니니 참 좋았다.



요즘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애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애까지 써야 하나 싶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길을 걸으며 검색을 하거나 카카오톡에 답을 하느라 하늘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스마트워치 때문에 바람을 느끼지 못할까 스마트워치도 일할 때 외에는 차고 다니지 않는다. 그냥 걷고, 그냥 커피를 마시고, 그냥 바람을 느끼고... 그렇게 순간에 나를 던져두곤 한다.


실컷 걷고 집에 돌아와서는 헬스장에 향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운동을 하기로 했다. 러닝머신 위에서 뛰다가 사이클을 탔는데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사이클은 참 좋다. 러닝머신만큼 힘들지 않지만 하체가 찌릿찌릿 해지는 게 운동효과는 최고다. 운동강도를 높이면 느껴지는 허벅지 근육의 탄력에 희열이 느껴진다. 그렇게 계속 사이클을 타다 보니 아이가 하교할 시간이 되었다. 재빨리 집으로 향했다.




아이가 들어오면 집안은 활기가 넘친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재잘재잘하다가, 피곤하다며 소파에 엎드리다가, 빌려온 책이 있다며 갑자기 책을 읽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꾸만 주제가 바뀌니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자! 그래! 이제 또 뭐를 할 거니? 무슨 이야기를 할 거니?'


한참을 놀다가 해질 때가 되어서야 아이는 숙제를 하기로 했다. 하교하고 실컷 놀아 이미 피곤해 노곤노곤해진 시간,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수학 두어 문제를 풀다가 아이는 어렵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 하고 내가 소리를 지르자, 아이 눈 안에 가득 담겨있던 눈물이 후두두두둑 흐른다. 구슬 같다. 너무 많이 쏟아져내려 마음이 아팠다.



문득 오늘 오전 보았던 담쟁이덩굴이 생각났다. 가을 하늘도 생각났다. 시원한 공기가 코에 스칠 때 쪽! 빨아먹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생각났다. 멍하니 굴려대던 헬스장의 사이클도 생각났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하루를 보냈으면서, 아이가 하교 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난 아마도 내내 조급해했겠지. 그러다 아이가 수학문제를 풀려고 앉았을 때 스치던 , 그제야 안심하던 나의 눈빛을 아이는 읽고야 말았을 것 같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어른인 나도 계속 놀고만 싶은데. 아이인 너는 말이야.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애쓴 주제에, 학교에 다녀와서 그제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아이의 시간을 난 편안하게 지켜보았을까....

아 너무나 후회된다.

가을은 나만의 것이 아닌데. 너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가을을 느낄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나'로서 느끼는 시간과 '엄마'로서 느끼는 시간이 이토록 괴리감이 있다니... 엄마란 참 제멋대로이고 희한한 존재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냄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