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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or review Aug 09. 2024

반전의 전반전

2024년 8월 둘째 주

낙차가 큰 글쓰기


기자가 되기 위해 글쓰기를 공부했습니다. '낙차가 큰 글'을 써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뽑히기 위해선 눈에 띄어야 하고, 눈에 띄기 위해선 '굴곡이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따라서 낙차가 큰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죠.


도대체 낙차가 큰 글이란 어떤 것일까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부부의 세계> 1화처럼 불륜을 곧바로 잡아내는 치정극을 써내야 하는지, <돌풍> 1화처럼 대통령을 죽이면서 시작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기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기자'는' 되지 못했습니다. 하하.. 또 모르죠. 기자'만' 되지 못했을지, 기자가 되지 '않았'는지.



낙차가 큰 시


출처 : unsplash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학창 시절에 배운 시를 대부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확히는) 기억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달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작품은 머릿속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김동명 작가의 <내 마음은>이라는 시입니다.


"은유법이란? 표현 속에 비유를 안 보이게 숨기는 거야. 대표적인 문장은 '내 마음은 호수요~'이고..." 선생님의 이 말씀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저절로, 통째로, 외워버렸죠. '그대 저어 오오'의 '오오'를 발음하기 위해 입을 계속 오므리면서요.


그런데 웬걸. 성인이 되어 <내 마음은> 시의 전문을 읽다 화들짝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한 결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오,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마음은 ‘낙엽’이 됩니다. 낙엽은 한 곳에 진득이 머무를 수 없는 법. 그대의 뜰에서 잠시 머물다가 나그네 같이 떠나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닥칩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로 첫 연만 달달 외우면 이 시는 완전히 오독하는 셈입니다. 


이 시의 정점은 결국 이별의 아픔을 그려낸 것에 있었기에, 성인이 된 저는 그야말로 반전과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습니다. 메모장에 '<내 마음은> = 반전 결말'이라고 써뒀을 정도죠.



자연의 반전


출처 : unsplash

문학에서만 반전이 등장하는 건 아닙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반전은 있는데요.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수업 365: 교양 편>에 나오는 '먹이사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수의 왕 사자가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전광석화 같이 빠르다. 이렇게 멋지고 당당한 사자는 작은 임팔라를 잡기 위해 시속 70~80km/h로 달리며 전력투구한다. 하지만 성공률은 20% 수준에 불과하다. 살기 위해 사자로부터 달아나는 동물의 필사적인 노력이 사자를 형편없는 사냥꾼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연의 세계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무조건' 또는 '절대로'가 없죠. '약육강식'이라지만, 때론 '약생강사'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또 다른 사례도 한 번 볼까요. EBS 다큐프라임 <목숨을 건 무당거미의 교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프리카 수컷 무당거미는 암컷과의 짝짓기에 모든 것을 건다. 종종 수컷은 암컷과 교미 도중이나 직후 배고픈 암컷에게 잡아 먹히기도 한다. 먹히지 않기 위해 수컷은 스스로 앞다리를 떼어내 암컷이 맛있게 먹는 동안 짝짓기를 길게 유지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김영하 작가의 소설제목처럼 동물에게도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나 봅니다. 짝짓기의 반전이죠.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거미가 다리를 끊어버리는 '자발적 파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끝나지 않는 반전


출처 : unsplash

반전은 우리의 삶에서도 이어집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가 협회를 비판한 '메달리스트 수상 소감' 또한 반전이었죠.


대체로 언론보도들이 중구난방이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안세영 선수는 작년 10월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전 도중 무릎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었고, 대한민국 배드민턴협회가 진행한 검진에서 '2~6주 재활' 진단을 받습니다. 


2. 하지만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다른 병원에서 재검진을 받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협회의 안일한 대응에 실망했다"고 말한 겁니다.


3. 하지만 협회는 "최선의 지원을 다 했다"고 A4용지 10장을 털어 반박했습니다. 이례적으로 외국인 전담 코치를 배정하고, 부상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이번 올림픽에 한의사까지 추가 파견했다고 했고요. 갈등 또한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4. 귀국한 안 선수는 "싸우려는 게 아니다"라며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아직 '안세영의 반전'은 전반전입니다. 더 많은 일들이 후반전에 나올 것만 같습니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의 MC 김현정 씨의 말을 들으면서 깊이 공감했는데요.


좀 안타까웠던 건 뭐냐면,
사실은 28년 만에 여자 단식 배드민턴 금메달이 나온 거 아닙니까.
본인은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지금, '나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을 때 얘기해야 힘을 얻을 것 같습니다. 이 발언이.'
그래서 그날 이 사실들을 폭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기쁨을 충분히 느끼지도 못했어요.
그 부분이 또 안타깝더라고요.
그날 꾹꾹 참아왔던 얘기를 터뜨리고 기쁨은 좀 뒤로한 채,
이 부분을 고쳐야겠다고 나선 거죠?


마이크의 기회가 고루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과 고질적인 갑을 관계의 비극.

그리고 이 이슈 역시 닳아져 버릴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반전이 너무 많고 낙차가 큰 일상은 제겐 조금 버겁네요.

이런 사람이 기자를 하는 건 애초에 무리인가 싶기도 하고요.



(아무도 큰 관심 없으시겠지만) 다음 주는 조금 짧고 가볍게 가려고 합니다.

짧고 소중한 휴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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