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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의 중력

2024년 8월 첫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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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소 어려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꽤 깁니다. 안전벨트 단단히 메시고 출발.


출처 : unsplash


2024 파리 올림픽


2024 파리 올림픽이 개막했습니다. 메달의 개수와 색깔을 다투는 기사들이 하나둘씩 쏟아집니다. 선수들의 노력이 명확한 숫자로 표현되는 보도 방식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그 숫자들에 집중합니다.


몇 등, 몇 점, 몇 초, 몇 번째, 몇 살, 몇 년 등등


일주일 내내 올라오는 그런 기사들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숫자 밖의 이야기들은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설사 그런 기사들이 이른바 '얘기(기자들의 아이템 선정 기준)'가 되는 '야마(주제)'를 정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구분 짓기라 하더라도요. 스포츠란 결국 경쟁이며, 그 경쟁의 승패는 결국 숫자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는 맹점을 감안하더라도요.


결국 그 숫자 밖의 이야기들이 '라디오스타'나 '유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예능을 통해 [비하인드]라는 명찰을 달고 웃으며 등장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작가님들 파이팅.



본질을 잊었나


누군가에게 침을 뱉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언론을 언론답게 만드는 건 저열한 조롱이 아닌 차가운 비판이다.


최문선 기자가 쓴 이 칼럼(20191003 한국일보發 <[36.5℃] ‘기레기’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침이 아닌 차가운 비판이 우리 언론에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올림픽 보도의 문제는 뭘까.


그 문제는 바로 '본질의 망각'에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의 이유는 저 또한 모 언론사에서 본질과 먼 '2022 카타르 월드컵 기사'를 양산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성하는 반추(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함)'랄까요.


출처 : unsplash

올림픽의 본질은 평화입니다. 올림픽 가치를 교육하기 위한 올림픽 정신 교육 교재 한국어 버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인간 존엄성의 보존에 관심이 있는 평화로운 사회로 고취하고자 하며,
그 관점에서 스포츠의 의무는 인간의 조화로운 발전을 이바지하는 데 있습니다.


번역투라서 말이 좀 꼬여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올림픽 정신은 총 두 개입니다.


1. 인간이 소중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2. 그 조화로운 사회를 스포츠라는 방식으로!


2024 파리 올림픽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남긴 한 번 보시죠.

올림픽 정신은 수많은 갈등과 희생자가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평화의 상징입니다.

올림픽 정신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서로를 존중하며, 관용과 상호 이해라는 주제를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는 평화의 기본 요소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의 문장들 또한 사실상 위와 똑같은 말이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얘기까지 첨언하진 않겠습니다.


법제처 홈페이지에 올라온 우리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참가하는 데 있다.
인생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것은 정복하는 데 있지 않고 멋있게 싸우는 데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말입니까. 스포츠의 본질을 '1등을 위한 경쟁'에서 찾는 게 아니라 '탁월함(Arete)을 이루기 위해 함께 도전'하는 것에서 찾는다는 뜻입니다(4년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보람이 느껴지는 몇 안 되는 순간입니다).


조화로운 사회를 위해 스포츠라는 방식을 가져온 것일 뿐, 스포츠의 목적 자체가 메달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올림픽의 메달 개수를 집요하게 따지고, 그걸 대한민국의 자존심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게 본질은 아니지 않나? 혼자 생각해 봅니다.



어린 왕자가 된 오늘


출처 : unsplash

바로 이 지점에서 <어린 왕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 친구에 대해 말할 때 본질적인 것에 대해 물어보는 법이 없다. 어른들은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앤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그 애는 나비를 수집하니?" 따위의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앤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니? 몸무게는 얼마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니?" 따위만 묻는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그 애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고 믿는 것이다. 만일 어른들에게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봤어요. 창에는 제라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고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에 어떤 집인지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들에게 "십만 프랑 짜리 집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이야 참 멋진 집이구나!"라고 소리를 지른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바로 그런 기사와 메달의 숫자를 따지는 건 '어른들의 생각'입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꾸준한 노력으로 한 땀 한 땀 빚어낸 메달'이라는 표현보다 '에펠탑의 실제 철제 조각이 새겨지고, 루이뷔통 가방에 담겨 있는 메달'이라는 표현이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이유입니다.


그러한 어른들의 생각들은 하나씩 겹쳐지며 점점 더 강력한 중력을 형성하죠. 느리지만 강력하게, 흐트러짐 없이 차곡차곡 쌓이면서요.


정세랑 작가의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에 나오는 표현대로라면, "대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철저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으로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철저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출처 : unsplash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중력에 이끌리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말하는 거죠.

"저거봐! 우리 별에서 떨어져 나간 우주인(혹은 어린 왕자)이야!"


제2의 이소연 박사가 될지언정, 전 커져가는 중심의 너머에 다소곳이 짱 박혀있는 본질을 보고자 합니다.


이근상 작가의 <당신의 브랜드는 브랜드가 아닐 수 있다>라는 책에 따르면, 그러한 본질은 실제로 돈이 됩니다!

마케팅이 시장을 흔들던 질풍노도의 50년을 지나 다시 본질의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제대로 된 본질이 없다면 그 무엇의 도움도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뒤집어 말하면 본질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잘 만들어가면 별다른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게 위안이라면 위안이고, 헛소리라면 헛소리로 들리시겠지만요.



최근 여러 도전들에 실패(정확히는 원하는 회사에 취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걸어가는 길이 잘못됐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 17번 정도 듭니다.

동시에, 저 길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루에 15번 정도 듭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얼추 깨우친 것 같은데요.

반대로 삶의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이건 제가 본질을 바라보지 못해서일까요.

아니면 너무나도 본질을 바라봐서일까요.

수십, 수백 개의 고민들로 채워가는 오늘입니다.

일단 평양냉면을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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