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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or review Jul 26. 2024

아주 가벼운 말들의 심연

2024년 7월 넷째 주

출처: unsplash

이번 주엔 예비군 훈련을 4일간 다녀왔습니다. 예비군 갈 땐 보통 어떤 생각을 하면서 가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전 대체로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아.. 너무 가기 싫다(순화 표현)


날씨는 30도를 넘어가고 습도는 50%를 넘는 상황에서도 훈련이 강행되는 예비군 훈련장. "선배님들!"과 "하.."가 반복되는 장소. 모든 예비군들의 안전하고 '의미 있는' 훈련이 되길 바랍니다.


보안 상 많은 것들을 말씀드릴 수 없다는 점을 양해 바랍니다.


 MZ세대, 멋진 예비군


MZ세대 멋진 예비군.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장난하는 것처럼 들리시나요?


하지만 이 말은 예비군 훈련장에 쓰여 있는 실제 표어입니다. 심지어 멋진의 ㅁ과 ㅈ은 M과 Z로 표현돼 'Mㅓㅅ Zㅣㄴ'으로 쓰여 있죠. 정말 기겁을 했습니다.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나, 그 아이디어를 컨펌해 준 리더십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처 : 넷플릭스

파이팅 국방부! 브라보! 호오~!! 멋지다 국방부!!

예비군 장병들은 전역 후 최대 8년 이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MZ 세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예비군이 멋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MZ세대의 본질은 연령이 아닙니다. 문화를 스스로 창조해 내는 하위문화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예비군의 본질 또한 멋짐이 아닙니다. 전쟁을 종결하는 데(상비군의 목적은 전쟁 억제) 예비군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MZ세대 MㅓㅅZㅣㄴ 예비군'이라는 표어는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그저 껍데기 그 자체입니다. 단 하나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 표어를 본 예비군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멋진 예비군이라고 자부심을 느낄까요. MZ 세대 예비군이라고 왕성한 혈기를 뿜어낼까요.



또 다른 가벼움



가벼운 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최근 제 유튜브 알고리즘에 떴던 가벼운 말들을 찾아봤습니다. MBC 뉴스데스크에서 공식적으로 논평한 내용을 먼저 인용해 보겠습니다. 


20240704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 

서울대 법대, 검사 출신이란 이력을 지닌 분들이라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고 법도 제일 많이 아는 축에 속할 겁니다. 군인의 순직을 얘기하면서 군 장비 파손(주진우 의원)이란 비유를 드는 것도, 국회 청문회 자리에서 공부는 내가 좀 더 잘했지 않겠어요?(유상범 의원) 라고 발언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했을까 싶은데요.


국회 필리버스터 과정에서도,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도 가벼운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말가벼움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심지어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죠. 어제 Youtube 채널 '침착맨'에 올라온 정재민 변호사(전 판사)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202400725 업로드된 침착맨 방송

침착맨 : "아 그럼 (법정에서) 웃참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정재민 변호사 : "아 너무 많죠! 하지만 막 참아야죠. 허벅지 때리면서 참고... 말장난을 끼어들고 싶을 때도 많은데.."


판사가 말장난을 하려고 끼어드는 상상은 제삼자의 관점에선 퍽 웃기지만, 사건의 당사자라면 분개할 것 같네요. 여하튼 법정에서도 가벼운 말은 여전히 오간다는 것, 그리고 그 말들을 온전히 소화하지 않기 위해 판사조차 고군분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가벼움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출처 : unsplash
그게 문제야? 왜 이렇게 부들부들 거려? 왜 자꾸 불-편해하냐?


일부 동의합니다. 가벼운 말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무거운 것들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20240722 동아일보發 <[동아광장/박원호]허상을 현실로 만든 한 발의 총탄> 칼럼에서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님의 질문도 동일합니다.


 “아무 말 대잔치”가 현실의 힘을 획득하고, 지속·증폭된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특히 이것이 폭력으로 구체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른바 '말의 나비효과'입니다. 트럼프 미 대선 후보가 귀에 총을 맞고 "Fight!"를 연호하던 모습에서 그 굴레의 심연을 본 것이죠. 그래서 지금을 '태평양 건너 일촉즉발의 불안한 상황'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우리나라라고 다를까요. (이 지점에서 글을 몇 번이나 쓰고 지웠습니다) '부정적인 말의 승수효과'는 분명히 어딘가에서 끊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원래 그런 소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선 늘 두꺼운 소문의 벽을 쌓아 주고 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 이청준 <소문의 벽>. 정확히는 수능에 나온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했던 그 책에서 우리 사회의 진짜 교훈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그 부정적인 말로 쌓인 '소문의 벽'을 과감히 무너뜨리기를 바랍니다.



가벼운 첨언



너무 무거운 얘기만 한 것 같아 긍정적인 가벼운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폴:인(생각보다 콘텐츠 너무 퀄리티가 좋아서 깜짝 놀랐던.. 콘텐츠 하나하나를 정독하면서 '이런 곳에서, 이들과, 이런 일을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본..) 아티클에 있던 내용입니다.

출처 : 농심

먹태깡을 유행시킨 농심의 황재경 경영정보팀 선임이 했던 말인데요. 


Q. 인플루언서를 사로잡은 DM 노하우, 따로 있을까요?

A. "(DM) 첫 소개에는 무조건 제가 어떤 사람인지 밝혀요. 저는 쌍둥이 아빠라고 가족을 내세워 소개하는 데요. 그게 타인에게 긴장감을 낮추는 효과를 주는 것 같고요. 회사 비전과 함께 '농심 직원'이라고 밝히면 다들 친근하게 받아주세요. 그러면 제품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이야기하죠. 맛만 보시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대부분 SNS에 제품 사진을 올려줘요. SNS에 저희 제품을 맛보게 됐다고 업로드해 주시면서 바이럴이 크게 됐어요. 그 일로 내부에서 공로상도 받았고요. DM으로 시작한 작은 일이 나비효과로 되돌아온 거죠."


이번 주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가벼운 말'들로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킨다는 겁니다. 쌍둥이 아빠가 농심 직원(심지어 마케터 x)인데 맛만 보시라고 먹태깡을 보내드리겠다고 한 거죠. 그러면 받는 사람 입장에선 'Why not?(그거 좋지!)'라고 생각할 터. 한 때 먹태깡 신드롬은 바로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무덥고 습합니다. 상황은 바뀔 수 없으니 말이라도, 한 마디라도, 한 글자라도 바꿔 가벼운 말이 허리케인을 몰고 오지 않도록 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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