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셋째 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한다. 거짓말이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발표한 ‘직업의식 및 직업윤리의 국제비교 연구’ 보고서를 보자.
5점 만점을 기준으로, 가장 '귀한' 직업은 국회의원(4.16)이었다. 반대로 건설일용직근로자(1.86)가 가장 '천한' 직업이었다. 그 사이에 약사(3.83), AI전문가(3.67), 소프트웨어개발자(3.58), 소방관(3.08), 사회복지사(2.54), 공장근로자(2.19), 음식점종업원(2.02)이 자리했다.
2023년 한국에서 직업 위세*가 높은 일은 국회의원, 약사, 인공지능전문가, 소프트웨어개발자, 영화감독이었다. 디지털콘텐츠 크리에이터, 중고교 교사, 은행 사무직원, 기계공학엔지니어, 중소기업 간부 사원, 소방관 등은 중위권에 포진하였다. 사회복지사, 공장근로자, 음식점 종업원, 건설일용근로자는 하위권에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기 평가 직업 위세는 1~5점 척도로 측정한 결과 2.79점으로 중간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며, 2007년 2.89점에 비해 소폭 하락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성인 취업자의 직업적 자존감과 직결되는 자기 평가 직업 위세가 약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직업에 귀천은 실제로 존재한다. 평균 2.79점 정도는 되어야 '귀하지도 천하지도 않은 그 중간'이라 말할 수 있다.
평균 2.79점에도 못 미치는 '천한' 직업 중에서 '도덕적으로 손가락질받을만한 일'이 바로 더티 워크다.
더티 워크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한 필수 노동'을 뜻한다. 쉽게 말해 '필요하지만, 내가 하고 싶진 않은 부도덕한 일'이다. 진짜 더럽다기보다는, '더러워 보이는 일'에 가깝다.
저자 이얼 프레스가 꼽은 대표적인 세 가지 더티 워커는 이것이다.
1. 학대가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교도소 정신병동 교도관
2. 드론 공습에서 원격으로 조종하는 영상 분석가
3. 세계 자본주의의 윤활유 뒤에 숨겨진 정육공장 노동자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재소자에게 가해지는 교도관의 폭행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드론 부대의 '조이스틱 전사들'이 발포 명령에 주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 적 있는가. 정육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구역질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없다. 더티 워커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위에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분명히 고통스러워한다. 더티 워커의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들이 아프다는 사실'이다. 몸이든 정신이든.
직업건강 관련 통계에서 찾아보면, 교도관은 고혈압·이혼·우울증·약물 남용·자살 위험률이 놀라울 정도로 높고, 뉴저지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따르면 교도관의 평균 기대수명은 58세다. 또 다른 연구에선 교도관의 자살 위험률은 나머지 노동인구 평균보다 39% 높았다.
심지어 정육 공장에서 일하는 스티븐은 "누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와 매우 가까웠던 할머니가 최근에 세상을 떠났을 때도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살인에 노출돼 감정적 마비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교도관 해리엇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이 감각은 어린 시절의 가장 암울했던 기억(아버지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힘이 없어 나서지 못했던 장면들)마저 끄집어냈다.
그러나 더티 워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실질적 고통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우리의 안중에 없다. 이것이 더티 워커의 두 번째 문제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맹점인 셈이다.
우리는 더티 워커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을까? 일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은 일을 하는 그들을 우리의 대리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빚, 그들의 섬뜩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빚을 졌다.
더티 워커는 분명히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쳇바퀴의 일원으로 기능한다. 사회 구성원으로 본인의 몫을 해낸다. 직업상 귀천을 따지기 이전에, 분명한 그들만의 역할이 있다.
그러나 그 역할은 축소되고 또 축소되어 마침내 눈에서 사라진다. 마치 어딘가로 치워야 '깨끗해'지는 쓰레기처럼 말이다.
그는 플로리다주 교도소의 환경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쓰레기 매립지에 대한 인식에 견주었다. “우리가 쓰레기를 내다 버리면 쓰레기가 어디론가 치워지잖아요. 우리는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갈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생각할 때는 매립지가 다 차서 새 매립지를 살 돈을 낼 때뿐이죠.”
이얼 프레스의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이러한 쓰레기를 생각하지 않도록 머릿속에서 자동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불편해하지 않게 막아주는 우리 머릿속의 여과기'가 열심히 돌아간다. 그럴수록 더티 워커는 더 안중에 없어지고, 더티 워커의 처우를 고민할 수 있는 사회적 논의의 장은 자취를 감춘다. 순식간에, 자연스럽게.
거의 모든 형태의 더티 워크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그것들이 숨겨져 있어서 ‘선량한 사람들’이 더 쉽게 눈감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린 이들을 위한 마이크가 없다.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파묻힌 더티 워커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 하나가 없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쓰레기 취급받는 더티워커는 회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세 번째 문제다. 가난에 묶인 더티 워커가 스스로 '더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더티 워커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덫이라고 느끼면서도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 또 그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어서 자신의 일자리에 매달린다. 더티 워커가 모두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티 워크를 선택하는 이들이 분명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다. 더티 워커에겐 돈이 필요하다. 당장 먹고살아야 할 돈이 절실하다. 그런데 더티 워크가 아니면 돈을 벌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살상용 드론 조종사에게 던지는 '도덕적인 비난'(예컨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무자비한 발사 버튼'을 누를 수 있느냐 등의 질책)은 반쪽짜리다. 도덕적 불평등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자리엔 경제적 불평등이 있다. 그러니 선후 관계를 뒤바꾸어 생각해선 안 된다. 더티 워크를 선택한 건, '더티 워크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선택지에 '더티 워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데이나 브리턴Dana Britton이《강철 우리 속에서 일하다At Work in the Iron Cage》(2003)에서 인터뷰한 교도관 중에는 “어릴 적 꿈이 교도관이었던 사람은 물론 본인의 희망으로 교도관이 된 사람조차” 없었다. 대부분이 한동안 “직업적으로 방황”하다가 별다른 포부 없이, 이 일이 뭔지도 거의 모르는 채 교도관이 되었다.
...
‘나는 시스템의 피해자였을까, 아니면 시스템의 도구였을까? 난 어느 쪽에 섰던 것일까?’ 때로는 자신에게 선택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데이드 교도소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나마 익숙한 또 다른 더티 워커는 '허삼관 매혈기'에 나온다. 피를 팔아 돈을 버는 아버지 허삼관이야말로 더티 워커였다(20240901 주간동아發 최성락 박사님의 칼럼 <돈이 좋아 자기 피 파는 사람은 없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은 몇 번이나 자기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한다. 피를 판 이유는 돈이 좋아서, 돈을 쌓아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대흉년이 들었을 때 가족을 먹여 살릴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첫째 아들이 큰 병에 걸렸는데 그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서, 둘째 아들이 군대에 끌려갔는데 군대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피를 팔았다. 피냐 돈이냐가 아니다. 자기 피냐, 가족의 생명이냐의 문제다. 자기 피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피를 팔고, 그렇게 번 돈을 쌓아놓은 채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신체가 돈으로 거래될 수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외 다른 방법으로는 돈을 구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게 문제다.
위와 같은 세 가지 문제로 인해 더티 워커와 非더티 워커는 서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 간극을 줄여야 하지 않나. 이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나. '이 간극의 밑바닥이 점차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려는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그러니 이 책을 읽어봐야 하지 않나.
이제는 부유한 특권층과 가난한 비특권층이 철저하게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듯이, 가장 생색도 안 나고 윤리적으로 문제 되는 일을 하는 사람과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생겨났다.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사회에서는 손을 더럽히는 짐을 누가 떠맡고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 혜택은 누가 누리는가 하는 문제 또한 경제적 특권에 따라 결정된다. 더티 워크가 이루어지는 고립된 장소를 피할 수 있는 능력, 그 누추한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티 워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옛날에 한창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돌았던 글을 옮겨 적어본다. 착잡하고 비참한 마음으로 옮긴다.
제목 : 200충 300충 하는데(2023.09.04)
난 그냥 그 사람이 일을 한다는 거 자체를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알지 않나. 200을 벌든 300을 벌든 쉬운 일은 없고 일마다 다 어렵고 힘든 점이 있다는 걸.
월요일 아침 7시에 눈 떠서, 혹은 더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오늘 하루도 그지 같은 회사, 일터에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상대방을 까내리는 것보다, 돈을 얼마나 버는지 보다, 본인의 삶을 정직하게 영위하고 힘든 삶 속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대견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서로 알아주면 좋겠다.
모두 힘내서 일하자.
제목 : 더티 워크: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저자 : 이얼 프레스
번역 : 오윤성
출판 : 한겨레출판사
발행 : 2023.05.26.
* 직업 위세란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직업에 대해서 그 직업이 가지고 있는 권위, 중요성, 가치, 존경에 대한 인식 정도 또는 평가"를 뜻한다. 이는 한 사회의 직업적 기회구조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주며, 일자리와 직업세계의 변화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인식구조와 연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