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가볍고 행복한 하루
퇴직 후, 3년 동안 정말 잘 쉬었다.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과 골프도 치고, 한때는 가볍게 등산을 다니면서 건강을 챙기기도 했다. 바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이렇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공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쉬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이런 기분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골프를 치러 가도, 친구들과 식사를 해도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일이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바빴고, 쉴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지니, 그걸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게 된 것이다.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렇게 결심했다. 하지만 무리한 일은 할 수 없었다. 체력을 너무 많이 쓰는 일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가벼운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자주 다니던 복지관의 취업 상담사를 찾아갔다.
“선생님, 어떤 일이든 좋으니까 가볍게 할 수 있는 일 없을까요?”
상담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학교안전지킴이’라는 활동을 추천해 줬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등하교를 돕고, 학교 주변을 순찰하는 역할이었다. 설명을 듣자마자 마음이 끌렸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왠지 활기가 생길 것 같았다. 바로 지원했고, 곧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학교로 출근하는 날, 괜히 설렜다. 40년 동안 회사에 출근하던 걸 생각하면, 이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교문 앞에 서 있는데, 어린 학생들이 하나둘 등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어색해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밝게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좋은 아침이야!”
아이들은 해맑았다. 눈이 반짝였고, 작은 몸을 흔들며 뛰어가는 모습이 참 예뻤다. 그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직원들과 미팅하고, 성과를 고민하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이제는 아이들의 웃음과 인사 한마디가 하루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선생님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연이 생겼다. 지나가는 길에 서서 믹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점점 편안해졌다. 예전에는 직장 내 인간관계도 철저한 비즈니스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대화 하나에도 여유가 느껴졌다.
“학생들이랑 함께하시니까 어떠세요?”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좋습니다. 하루가 이렇게 가볍게 흘러갈 줄은 몰랐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 친구들과 장난치는 모습, 수업이 끝나고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해맑은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일이 점점 좋아졌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골프도 좋고, 여행도 좋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이제 나는 매일 아침 학교로 간다. 아이들이 밝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다시 일을 찾았다. 돈이 아니라, 내 삶을 채워줄 수 있는 일을.
그리고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