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삶의 의미를 다시 찾는 여정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잖아.

by 이서명


정년퇴직 후, 하루하루가 길었다. 처음에는 여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에 잡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평생을 일만 해온 사람으로서 노는 것도 고욕이다.

다시 일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오랜 시간 몸담았던 금형 설계·생산직이면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력서를 내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겨우 면접을 보게 되어도 번번이 불합격했다.

고향인 창원에 내려가 다시 일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여기서도 되는 일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차라리 고향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기차표를 끊었다.


창원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서울을 벗어나면서 빽빽한 아파트 숲이 사라지고 논밭과 낮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뛰어놀던 들판도 언뜻 보였다. 창가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다시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곳에 가면 정말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였다.


기차가 지나가는 작은 역들에는 노란 은행잎이 쌓여 있었다. 간이역에 멈춰 있는 동안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일터로 향하는 사람도, 저마다의 목적지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어떤 목적지로 가고 있는 걸까.


도착 후, 익숙한 거리와 낯설어진 분위기 속에서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나이를 묻는 순간 면접관의 표정이 달라졌다. "체력적으로 괜찮으시겠어요?"라는 말이 이어졌다. 최선을 다해 대답했지만, 며칠 뒤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제야 현실을 인정하게 됐다. 서울에서나, 창원에서나, 나이의 벽을 넘기는 힘들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로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취업센터에서 하는 특강을 들으러 가보기로 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니,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었다.

강사는 말했다.

“여러분, 원하는 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미 경비직, 주차관리, 청소 등으로 전직한 사람들이 예전보다는 덜 벌지만, 스트레스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적응하고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강사의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했다. ‘과연 내가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했다.


경비직을 알아보기로 했다. 직접 공고를 찾아보고 이력서를 넣었다. 막상 시작해 보니 경비직은 생각보다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체력 부담도 덜했고, 일정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면접에서도 크게 까다로운 질문 없이 쉽게 통과되었다. 그리고 곧 취업이 확정되었다.


처음 며칠은 어색했다. 예전에 하던 일과 너무 달랐다. 하루 종일 기계 소리에 시달리던 공장과 달리, 근무지에서는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하는 일이 단순했고,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가끔은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늘 긴장해야 했다. 작은 실수도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고, 작업 속도에 맞추려면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 쫓기지 않았고, 여유로운 시간이 많았다.

경비 업무는 이전의 일과 비교하면 단순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출입구 앞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마다 같은 주민이 전해주는 캔커피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했던 마음이,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평생 생산직으로만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다"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이렇게 노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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