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옳았다 2화

실화 소설

by 홍유진

하양은 늘 바빴다.


해야 하는 일에 치이고, 하고 싶은 일에 쫓기면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고민하느라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매일같이 피곤에 시달렸고, 제대로 먹고 자고 싸기 위해서라도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이기를 바랐으며, 아침이면 또다시 밀려드는 일상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을 빼닮은 복제 인간이 나타나 삶의 짐을 나누는 헛된 상상에 매달리기도 했다.


1년 새 몸무게가 10kg 정도 빠지고, 3번쯤 토했으며, 한여름에도 가끔 몸이 으슬으슬하고 손과 발에 쥐가 났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네킹 몸매라는 둥 들르는 옷가게마다 직원들이 침을 튀기며 늘어놓는 칭찬이나, 좀처럼 입을 수 없던 날씬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볼 때의 즐거움, 거리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의 시선에서 느끼는 달콤함이 건강에 대한 티끌만 한 의심도 뿌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년이 더 흐른 겨울에야, 양은 병원을 찾았다. 피부과였다. 그즈음 어디에 살짝만 부딪혀도 피멍이 들고 벌에 쏘인 듯 잔뜩 부어올랐고, 마침내 양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온갖 잡티와 주름을 없애러 온 비싼 고객들을 돌보느라 제대로 자리에 앉을 겨를도 없던 의사는, 진료실 문 앞에 선 채로 양의 차트와 멍 자국을 대충 훑어보더니 나무라듯 말했다.


“너무 마르셔서 그래요. 지방이 거의 없으니까 어디든 조금만 박아도 붓고 아픈 겁니다. 식사를 좀 열심히 하세요. 다이어트하지 마시고!”


“선생님, 전 평생 살을 빼 본 적이 없어요.”


“나 참, 다이어트 안 하는 여자가 요즘 어디 있다고. 가급적 안 부딪치게 조심하세요. 여자들은 피부가 약해서 원래 멍이 잘 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병원에 다시 올 필요는 없어요. 알았죠?”


딱 잘라 내치는 의사의 말에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일에 파묻혀 사는 양의 생활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최고의 다이어트였다. 전문가인 의사가 괜찮다는데 굳이 다른 병원을 또 찾을 만큼 여유롭지도 못했다. 이날 양은 근처 약국에서 멍을 잘 뺀다는 비싼 연고만 하나 사서 돌아왔다.


이어진 봄, 자궁 경부암 예방 주사를 맞으려고 찾은 산부인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깔끔한 단발머리의 의사는 접종 전 기본 검사 결과, 소변에서 단백질이 많이 나왔다며 위로하듯 말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정상인도 피곤하면 단백뇨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시는 일이 많이 힘드신가요?”


“네. 일에 눌려 죽을 거 같아요.”


양은 말로나마 피로를 털어 내며 웃었다.


“그럼 아마 피곤하셔서 그렇겠네요. 1차 접종을 하고 가시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2차 접종 전에 소변 검사를 한 번 더 해 봅시다.”


“네.”


하지만 다음번에도 단백질 수치가 높았고, 체온까지 37도를 넘어서 2차 접종은 미뤄졌다.


“이번에도 단백뇨 수치가 높네요. 미열도 있으니 가까운 내과에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필요하면 거기서 약도 처방받아 드시고, 좀 푹 쉬세요. 나머지 주사는 천천히 맞읍시다.”


하지만 다른 병원에 갈 틈이 양에게는 없었다. 산부인과도 출근길에 우연히 본 인터넷 뉴스 때문에 겨우 짬을 내 찾은 터였다. 자궁 경부암에 걸리면 지독하게 아프다는 댓글에 잔뜩 겁을 먹어서였다. 내과에 다녀오라던 산부인과에서도 2차 주사를 맞으러 언제 다시 올 거냐며 묻는 간호사의 전화가 한 번 왔을 뿐, 다른 말이나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그 뒤 양의 인생에 2번의 이상한 사건이 없었다면, 이 글은 시작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