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소시오패스 사진가 이동식
과격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세상엔 참 미친놈이 많다. 지금까지 다루어 온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그러했듯 이동식이란 인물 역시 도무지 본인의 상식 수준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다.
1983년 1월 11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호암산에서 눈 놀이를 즐기던 어린아이들이 한 여성의 시체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마네킹이 버려진 줄 알았지만 가까이 다가갔다가 시체란 사실을 알고 나서는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를 했다.
경찰들은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알몸 상태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간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의문에 빠졌다. 대체 왜 한겨울에 산에 올라 옷을 벗고 죽어있을까? 시체는 이미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지만 다른 곳에서 옮겨온 흔적도 없었다.
결국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져 부검이 실시되었다. 시신의 지문으로 신원을 조회해 보니 성남시 신흥동에 거주하는 김씨로 밝혀졌다. 그녀는 강동구(현 송파구) 가락동의 주공아파트 단지 내의 이발소에서 면도사로 일하던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진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 인물을 탐색하던 경찰은 단골 손님 중에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밝혔던 이동식이란 인물이 김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동식은 배관공으로 일하며 사진을 취미로 즐기던 인물로 나름대로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도 하고 개인적을 연 적도 있었다.
경찰은 이동식을 찾아가 "진양을 아느냐?"고 물었고, 이동식은 "안다. 단골이다."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사진작가라고 밝히는 그에게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좀 보겠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동식은 자신이 준비해 놓았던 사진 100여 장을 꺼내 놓았다. 대부분이 여성의 나체 사진으로,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모습, 목을 맨 모습, 시체를 가장한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이상하고 기괴한 모습이었고 경찰들이 여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이동식은 문갑과 벽 사이의 공간으로 사진 1장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고, 꺼내어 보니 무릎까지 올라오는 갈색 부츠에 회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낙엽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는데 얼굴에는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서기만 당시 수사반장은 사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했고, 이동식은 “모델을 고용해 연출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경찰은 그 사진을 김씨의 동거남에게 보여주었고, 그 결과 그 사진의 인물이 김씨라는 확인을 받아냈다. 그러자 이동식은 말을 바꾸어 “진양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사진을 찍고 보내주었다. 아마 내가 가고 난 후에 자살했나 보다.”라는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수사팀은 이동식의 집에서 숨진 김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 21장을 더 찾아내었고, 당시의 현장 검증 사진 속 나체 사진과 옷을 입고 천을 덮고 누워 있는 초기 압수 사진을 비교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진에서 김 씨 주변의 갈대, 나뭇잎 등의 모양이 같다. 이것은 이동이 없었다는 증거이다.”라며 이동식을 압박할 수 있었다. 이동식은 다시 말을 바꿔 “여자가 살자고 들러붙었다. 떼어내기 위해 죽였다. 소리를 질러서 입을 막아 죽였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국과수의 부검 결과 희생자는 질식사가 아닌 청산가리에 의한 독극물 사망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부인하는 이동식의 자백을 얻기 위해 경찰들은 전문적으로 사진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진작가 협회의 홍순택 신구대학 교수가 이 사진 분석을 맡기게 되었다. 홍교수와 사진작가 김문환씨는 21장의 사진들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명지털(솜털의 일종)이 시간 순서에 따라 다르게 누워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사람이 죽으면 신체의 명지털도 서서히 눕게되는데, 이동식의 사진들에서 그것을 확인한 것이다. 즉, 이동식은 김씨에게 청산가리를 먹여 그녀가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 아시아경제
그렇다면 대체 이동식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동식은 6살에 고아가 되었고, 숙부의 집에서 국민학교를 나와 14살에 서울에 상경하였다. 이후 수유리 일대의 넝마주이(헌 옷이나 헌 종이, 폐품 등을 주워 모으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인) 단체에 들어가 15년 동안 넝마주이를 하며 살았다. 23살에 특수절도죄로 입건된 기록을 포함해 이 사건 당시 이미 전과 3범이었고, 베트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30대 중반에 처음 사진의 매력에 빠진 그는 우연히 닭을 잡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이 사진이 사진전에서 입상하며 스스로를 대단히 능력있는 사진작가로 착각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성적인 묘사를 주로 사진으로 담아 인지도를 얻게된 그는 점차 그런 사진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자 결국 실제 죽음을 연출하여 사진을 찍게 된 것이다.
사건 당시 동아일보 신문 기사
모든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이동식은 끊임없이 변명을 늘어놓았으며, 나중에는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 그것은 예술이다. 나는 예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런 것을 늘 동경해 왔다”고 진술하며 끝까지 반성이 아닌 변명을 늘어 놓았다.
사건이 연일 대서특필 되자 전처 방옥수(당시 31세)의 가족이 수사팀을 찾아와 8년 전 실종된 방 씨를 찾아달라고 신고했는데, 경찰의 추궁 끝에 자신이 “전처를 죽여 파묻었다”고 진술했으나 그 장소에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고, 때마침 해외로 타전된 사건이 크게 이슈가 되면서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한 당시 군사정권이 “사건을 빨리 덮으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경찰은 수사를 종료해야만 했다. 그에 의해 피해를 입을 여성들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사건은 그렇게 묻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1986년 5월 27일, 이동식은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동식은 사회에 대한 분노도, 성적인 쾌락을 위해서도, 돈이나 재물 같은 금품을 위해서도 아닌 그저 자신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 캡슐에 청산가리를 넣은 약을 한 여인에게 먹이고 그녀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즐거워하며 카메라에 담았으며, 나중에는 죽은 그녀의 옷을 벗겨내고 나체인 모습까지 찍고 나서 제대로 묻지도 않고 대충 근처의 낙옆과 흙으로 덮어만 놓고 자리를 벗어났다. 당시 수사를 했던 경찰들은 이동식은 사이코패스라기 보다는 그저 거짓말에 능한 살인마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이동식은 소시오패스임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