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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Jan 12. 2022

아빠, 여동생을 입양해서 데리고 오자고요?

10살 터울 여동생이 생기게 된 이유

아빠는 특히 우리 아들들에게 각별했어요. 


주말이면 같이 배드민턴도 치고, 탁구도 치고,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신나게 축구를 하며 땀을 뻘뻘 낸 뒤, 동네 목욕탕에 들러서 목욕도 했어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세 남자는 목욕탕에서 투덜투덜 묵은 때를 벗기고, 목욕탕에서 판매하는 시원한 음료수 한잔으로 목을 축이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어요. 


그런 아빠에게도 한 가지 바람이 있었어요. 아빠, 엄마는 언젠가부터 딸을 갖기를 원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즘 되었을 거예요. 아빠가 가족회의를 하자며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았어요. 


"너희들이 아주 잘 커주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성장해줘서 아빠, 엄마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보람된단다. 아빠, 엄마가 상의를 했는데 너희들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저는 좋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두 남자 아이들에게는 그저 '여동생'이 생기면 좋은 것일 뿐, 동생이 가져오는 그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빠는 대화를 이어나갔어요.


"다만, 걸리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갖게 되면 노산이 되고, 건강에 무리가 될 수가 있다고 해. 너희들이 괜찮다면 아빠는 입양을 생각하고 있단다. 어떻게 생각하니?"


입양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기도 했고, 개념은 알아도 구체적으로 입양이 무엇인지,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입양을 온 아이와 관계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당연히 괜찮다고 답변했어요. 


아빠는 그 이후 실제로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입양기관에 연락을 취해 여기저기 알아보았어요. 그러더니 하루는 나를 앞에 앉혀놓고는,


"입양을 알아보러 기관에 갔더니, 돈을 주고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하더구나. 이게 말이 되니. 사람을 돈을 주고 데리고 오는 것이 아빠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기분이 무척 안좋네"


일종의 기부금, 책임비 같은 비용 같은데 아빠는 사람을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것에 대한 행정절차에 대하여 굉장히 거부감을 갖고 있었어요. 결국 입양 문턱까지 갔다가 입양은 무산이 되었고, 두 형제는 그 이후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다시 가족을 불러 모았어요. 그러고는,


"얘들아, 엄마에게 새 생명이 잉태되었단다. 축하드리렴. 그리고 앞으로 엄마는 우리 삼부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지켜드리자꾸나"


아빠는 마치 엄마를 '여왕벌' 모시듯이 지극정성으로 모셨어요. 엄마는 건강하게 순산할 수 있도록 매일매일 기도를 드렸고, 이왕이면 아들 셋보다는 여자아이가 나오면 좋기 때문에 안방 벽면과 거울에 예쁜 여자 아이 사진으로 도배를 해 놓았어요. 잡지나 신문에서 예쁘고 똘망한 여자아이 사진이 있으면 모두 오려서 붙여 놓았던 거예요. 


사실 속으로 조금 불안했어요.


'아빠, 엄마가 딸을 원하시는데, 이러다가 또 아들이 나오면 어쩌지?' 


아빠 엄마는 큰 모험을 했던 것이였어요. 지금이야 결혼과 출산을 늦게 해서 그렇지, 그때 당시 엄마 나이 30대 후반에 출산을 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엄마와 태어날 아기의 건강 걱정을 많이 했어요.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은 대부분 남자 형제들로만 가득했어요. 큰아빠도 아들 둘, 아빠도 아들 둘, 작은 아빠도 아들 둘 (고모들은 딸이 있었음) 등 위로 봐도 아들들, 아래로 봐도 아들들 밖에 없는 집안이었어요. 


그러니, 또 아들이 나오면 (물론 크나큰 축복이지만)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그때 당시 성별을 알려주지 않아서, 출산 당일 태어나봐야 성별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만삭 때, 근처 외삼촌댁에 놀러 갔다가 엄마는 산통을 시작했고 산부인과로 곧장 출발했어요.아빠가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때 당시 외숙모가 같이 동행을 했는데, 아빠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출산을 한 직후였고 동행했던 외숙모의 한마디가 아빠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주었어요.


"고모부, 없어요. 없어"


딸이라는 것의 굉장히 정겨운 표현이죠. 이렇게 우리 두 형제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예쁜 여동생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10살 터울이 나는 여동생이니,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여동생이 태어난 셈이지요. 여동생이 얼마나 예쁜지 나는 학교에 가면 수업시간에도 여동생 얼굴이 아른거렸어요. 평소라면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축구도 하고, 근처 문구점에서 재밌게 놀고 해야 할 시간에 나는 여동생을 보기 위해 집으로 곧장 뛰어왔어요. 그 설레는 마음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10살짜리 초등학생이 신생아 갓난아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어요. 그냥 바라만 봐도 너무 귀엽고 신기했던 거예요. 



여동생 (좌), 아내 (우)/// 여동생과 아내는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아들 둘에 딸 하나. 


아빠, 엄마는 항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여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 아빠, 두 오빠 속 한번 안 썩히고 예쁘고 건강하게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커서 모두 사회의 일원이 되고 저는 두 아이 아빠가 되었네요.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나도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아빠 상황을 나에게 대입하여, 내 큰아이가 10살이 되었을 때, 딸을 키우고 싶어서 입양을 고려해 보겠느냐, 혹은 아이 하나를 더 낳을 수 있겠느냐 물어본다면 나와 아내는 그럴 용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빠는 그때 당시 용기 있는 결단을 하였고, 그 용단이 지금의 아름다운 결실로 맺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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