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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집고양이 Jul 23. 2021

삶의 냄새,체리 향기

체리 디저트를 만드는 시간

초코 체리 샤를로트 케이크




죽고 싶어서 나무에 줄을 매달아 보려고 끙끙대며 나무 위로 올라갔던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밧줄을 나무에 묶다가 우연히 손에 체리가 닿는다. 그는 죽기 전에 체리를 맛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금 살아야겠다는 행복감과 의지를 맛본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다음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위해 나무를 흔들어 체리를 따주고 한아름 체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훗날 자신이 죽으면 땅에 묻어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면서 차를 몰고 가는 사내에게, 노인이 된 남자는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수면제를 먹고 땅에 누워 그 위로 흙이 덮이기를 바랐던 사내는 노인이 된 남자의 체리 향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을까? 그는 살아남았을까 궁금했다. 


이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 향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죽으러 가는 남자의 차에 얻어 탄 사람들이 땅에 드러누운 자신의 위로 흙을 뿌려달라고 했을 때 모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지만, 어쨌든 감독은 끝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체리 향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안다. 삶을 일깨우고, 삶을 다독이고, 우리의 감각이 깨어나 그것이 지속되게끔 만드는 풍성한 어떤 것. 체리는 그런 맛인가 보다.



케이크 한 조각과 함께하는 휴식시간.



바야흐로 체리의 계절. 우리에게는 그저 외국산 과일일 뿐이지만, 영화 속 그곳의 사람들에게 체리는 나무에 매달려 자라나는 생명이었나 보다. 나는 배를 타고 온 체리로 디저트를 만든다. 씨를 골라내기 귀찮은 가족들은 그냥 줘서는 잘 먹지 않는다. 그래도 신선한 생체리를 실컷 쓸 수 있는 것도 여름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니까 누려보기로 한다. 


체리는 초콜릿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초콜릿과 체리의 어딘가에 양다리를 걸친 샤를로트 케이크를 만들었다. 바닐라 크림도 넣고 체리를 졸여서 만든 레이어도 끼워 넣었다. 샤를로트의 테두리에는 코코아 파우더를 넣은 비스퀴를 두르고 안에는 초콜릿 제누아즈를 깔았다. 가장 위쪽에는 초콜릿 무스와 체리 무스 사이에서 백만 번 갈등하다가 체리 무스를 넣고는 조금 후회했다. 체리는 초콜릿 속에 숨어있는 편이 더 신비로웠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위에 가나슈 장식을 또 뒤덮었다. 내 테크닉보다 케이크 레이어만 요란해진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언젠가 만들었던 초코 체리 타르트.



통조림이 우리나라에서 망쳐놓은 과일 중 대표적인 것이 체리일 텐데, 생체리를 이렇게까지 먹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체리에 대한 어릴 적의 추억 같은 것은 없다. 나는 그저 체리 디저트를 만들면서 얼마 전에 동네 주변에서 일어난 10대 아이의 자살사건을 떠올렸다. 묘하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겹쳐졌다. 과연 주인공은 죽었을까, 아니면 살아남았을까... 지금에도 그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또 그 10대 아이처럼 허망하게 다른 길로 떠나버린 사람들은 살 수 있었을까, 아니면 방법이 정말로 없었던 것일까.


영화 속 체리는 통조림이 아니라 나무에 매달린 풍성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삶이 기반째 흔들리고 모든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에 무감각해질 때, 더 이상 생존한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어떤 경계 같은 것이 있나 보다. 거기에는 체리 향기를 느끼고, 손에 스치는 체리의 감각을 느끼고, 그 맛이 주는 새로운 자극을 느낄 무엇이 빠져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무감각의 지속 안에서 떠나기를 희망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 본적이 없지만, 계속 슬픈 사람들보다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이 더 쉽게 떠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통조림 속 체리처럼 풍성하고 다양한 감각을 뭉뚱그려버리면, 그렇게 떠나는 일이 쉬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보다 삶의 경계는 단순한 것은 아닐까.


초코 체리 케이크. 다음에는 다른 것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의지가 활활.


살아있음에, 모든 감각으로 계절을 느끼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식욕이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시점을 온몸으로 알고 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어쩌면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다지 복잡한 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느끼는 모든 감각들을 내일도, 모레도 그저 이것저것 느껴보고 싶다는 의지와 욕망 같은 것. 그런 힘마저 인생에서 사라진 후에는 살아있음의 의미가 소멸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체리 향기>는 낯선 영화였지만, 또 지극히 단순하리만치 당연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영화이기도 했다. 


통조림으로 체리를 배웠던 우리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체리 향기 대신 남는 감각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열이면 열,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맞는 말이다. 그 감각으로서 풍요로워질 수 있고, 깨어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계절마다 다가오는 모든 과일들을 즐겁게 디저트로 만들어가며 이 답답한 시간과 뜨거운 열기를 잘 느끼고 살아보기로 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온몸에 곤두선 감각으로 일상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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