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필이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단답형 주관식 쓰기'는 물론이거니와, 대입시험 · 입사시험 등에서 꼭 필요했던 '서술형 답안 쓰기'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요한 시험 전날이면, 나는 백지를 내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고,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답지를 가득 채우다가 결국 온 세상이 캄캄해지는 꿈을 자주 꿨었다.
반면, 나는 글짓기를 좋아하기도 잘하기도 했다. 문학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소설, 시, 에세이 등의 장르에 푹 빠져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나의 특기를 살려서, 군 복무 중에는 '연애편지 대필 작가'로서 화려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다. 당시만 해도 '좋은 생각' 등의 잡지 제일 마지막 장에 '우리 펜팔 해요'라는 코너가 있어, 새로운 월간호가 발행될 때마다 선후임 병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자기들의 미래 애인들을 점찍어 보는 게 큰 낙이었다. 딸랑 '편지 받을 주소'와 '가명' 정도만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얼굴이 어떤지,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간단한 자기소개의 글을 통해 그 모든 걸 파악하고 '예쁜 미래의 애인'을 찾아내는 능력이야 말로, 진정한 '연애편지 대필작가'의 화룡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여심을 뒤흔드는 '감성쩌는 어휘'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편지를 보냈다 하면, 바로 답장이 오게 만들 수 있는 '백발백중 명사수'였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보낸 편지였던 것 같다. 나의 사수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상대방에게 아주 잘 전달이 되었고, 그렇게 몇 번의 답장에 답장을 거쳐, 실제 그 선임이 휴가 때 그녀를 만나고 오는 '대박 사건'이 있었다. 더 운이 좋았던 것은 사진으로 확인한 그녀는 정말로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기분이 너무 좋아진 선임은 부대 전체에 소문을 냈고, 그 뒤로 나는 군생활을 정말 편하게 했다. 그저 쓰고 또 쓰기만 하면 됐다. 상대의 마음을 읽고, 선임들의 인생을 가미하여 정성스럽게 남의 연애편지를 매일 써 내려갔다. 단, 나도 내 후임을 '손글씨 대필' 작가로 채용하면서 말이다. 내가 머릿속에 있는 문장을 불러주면, 내 후임은 받아쓰고 지우고 또 적었다. 참, '손글씨 대필'을 두니 이렇게 편할 줄이야... '나의 악필'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유일한 시기였던 것 같다.
문제는 실제로 내가 연애를 하면서부터였다. 나의 필살기인 연애 편지로 여친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일필휘지로 대필하던 때와 달리, 고치고 또 고쳐서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녀에게 편지를 전했다. '이 정도면 완전히 푹 빠져들겠지'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녀에게 편지를 주면 줄수록 빗발치는 민원이 계속되었다. '도대체 뭐라고 쓴 거냐, 이게 무슨 글씨냐, 성의가 있긴 한 거냐...' 아뿔싸, 이제 나에겐 더 이상의 '손글씨 대필 후임'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도구와 형식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사랑의 세레나데'가 되어야 할 손 편지가 '다툼의 씨앗'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 그 후로 손 편지를 쓰지 않았다. 가끔, '한글 워드'를 이용해서 A4 용지로 출력해서 편지를 준 적이 있긴 하지만, '편지지 만의 멋'이 없었다. 받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감동적이기나 했을까?
다행히 회사 생활하면서는 손글씨를 써야 할 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손글씨와는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
그러다가 지난 9월의 어느 날, 문득 손글씨를 잘 써보고 싶다는 들었다. 정말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마구 샘솟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엇인가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땐 정말 그랬다. 그래서 제목부터 딱 마음에 들었던 '나도 손글씨 바르게 쓰면 소원이 없겠네'라는 책을 바로 구입했고, 그날부터 손글씨 교정을 시작했다.
매일 네시 반에 일어나서 삼십 분씩, 명상음악을 틀어놓고, 정갈한 마음으로 교본의 글씨대로 한 자, 한 자 따랐어 보았다. 먼저 연필 잡는 법을 고치고, 가로 획긋기/세로 획긋기, 자음/모음 따라 쓰기, 받침글자 쓰기...
'와!', 정말 스스로 엄청 놀랐다. 딱 일주일이 걸렸다. 이렇게 딱 일주일이면 되는 것을, 내 편견에 갇혀 있었던 지난 사십 년의 세월이 허무했다. 아마도 일곱 살, 연필을 처음 잡았을 때, 그때 시작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엄지와 검지와 중지가 삼각형이 되도록 연필을 잡기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만 알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손글씨로 평생 고통받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손재주가 없어'라는 말을 평생 듣고, 또 하면서 살아왔다. 아버지가 손재주가 없으셨고, 엄마도 그런 것 같고, 그래서 나도 그렇다고 푸념하면서 말이다. '손재주'라고 하면 만들기, 그리기, 고치기, 글쓰기 등 통상 손으로 무엇인가를 하여, 그 결과물을 얻어내는 솜씨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 사실, 손재주에 속하는 카테고리 중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아마 나는 어렸을 때부터 '손글씨'를 잘 못쓰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왔던 것 같다. '손재주가 없는 내가 손글씨를 어떻게 잘 쓰겠어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평생 손글씨를 교정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딱 일주일이면 바꿀 수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 후로도 매일 조금씩 손글씨 연습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급하게 뭔가를 메모해야 할 때면 다시 옛날의 그 악필로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손글씨 쓰기의 '기본 틀'이 달라진 것은 확실하다. 어떻게 연필을 잡아야 하고, 손의 어느 부위에 연필을 기대야 하며, 어느 손가락에 힘을 주어야 글씨가 예쁘게 써지는 지를 구조적으로 깨달았다.
'예쁜 손글씨'는 내게 '가슴 벅찬 자신감'을 선사했다. 단지, 악필을 교정했다는 결과론적 뿌듯함 뿐만 아니라, 내가 그동안 잘 못했던 어떤 일이라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미래 지향적인 자신감' 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하나하나 시작해 보려 한다. 젓가락질, 캘리그래피, 그림 그리기, 레고 만들기 등등 그래서 몇 가지 책을 바로 주문했다. '나의 취미생활 캘리그래피' 그리고 '그림 그리기가 이토록 쉬울 줄이야'라는 책이다. 이제부터 나도 손재주가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
곧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 정말 오랜만에 아내에게 손 편지를 써봤다. 이번엔 아내가 칭찬해 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