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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주인 Apr 17. 2024

죽어가던 싱글대디, 나비가 날아오다

싱글대디&미스 재혼가정 연대기<1>

대학 2학년 때 만난 동아리 후배와 불같은 사랑을 했다.

ROTC 복무 중 중위를 달자마자 결혼했다. 떨어지기 싫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 난 25살이었다.

주변에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난 들리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그때 나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27살에 아빠가 됐다.

아이가 초등생이 될 무렵 IMF가 터졌다. 우리집도 본가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현실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우리 부부의 다름이 극명하게 표출됐다. 하지만 그 당시엔 다름을 인정하기에 우린 너무 철이 없었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가족이 깨진다는 것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친권과 양육권을 내가 가져간다고 하면 아내가 생각을 바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내는 이혼해야겠다고 했다. 내가 반대할수록 감정은 격해졌고 상처는 커졌다. 아내를 설득할 수 없음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지금은 아내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하니 우선 이혼에 합의하고 추후 다시 합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순진했던 걸까, 바보였을까?) 이혼에 합의하겠다는 내 말에 장모님은 나를 공증소에 끌고 갔다.

2008년 12월 31일.

서초동 가정법원 횡단보도에서 우린 악수하고 헤어졌다.


회사 근처에 집을 얻었다.

아이를 전학시킬 초등학교에 미리 가보았다. 방과 후라서 인지 학교는 정적이 흘렀다.

눈물이 났다. 평생 울지 않았던 경상도 사나이가 오열했다.

이제 난 싱글대디가 된 것이다.


이혼 소식에 집안이 뒤집어졌다.

난 이혼 직전까지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들과 둘이 있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내가 자식을 데리고 있으면 나도 자식도 망한다고 본인들이 손자를 돌보겠다고 하셨다.

내 자식은 내가 키우겠다고 버텼지만 부모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아들은 본가가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부모님은 나에게 주셨던 것처럼 나의 아이에게도 사랑을 듬뿍 주셨다.

그분들도 많이 힘드셨으리라.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혼은 동사무소에 서류를 접수해야 종결된다.

도장을 찍기 전에 아내에게 부탁했던 게 있었다. 아이가 전학을 가야 하는데 서류에 이혼이 나오면 안 좋으니

3월 전학 후 이혼서류를 접수해 달라고...

1월 초, 며칠이었던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사무소에 갔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보니 이미 아내는 없었다.

아이 엄마에게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엄마가 아이를 찾지 않았다. 면접교섭권에는 '항상, 언제나' 라고 적혀 있었지만 연락이 뜸했다. 아이를 보러 내려오지 않았다. 초기에 두 번 정도 왔던 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양육비도 보내지 않았다.


이때 깨달았다.

내 가정이 정말 깨졌다는 것을.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후폭풍이 크게 왔다.


나쁜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가만히 있을수록 나쁜 생각이 나를 잡아먹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지켜야 했다. 나를 놓더라도 아이를 놓을 순 없었다. 내가 딴생각을 못하게 나를 몰아붙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세 가지에 몰입했다.

낮 : 운영팀을 떠나 사업팀을 만들었다. 미친 듯이 일했고 양육비를 더 벌었다.

밤 : 술술술... 

주말 : 대구 내려가 아이와 함께 있기.


밤에 술이 깨면 나쁜 생각이 찾아왔다. 

시간이 멈췄다. 숨이 막혔다. 술을 또 먹었다. 고량주...보드카....독주를 맥주잔에 먹었다. 블랙아웃은 일상이었다. 나는 알콜중독자가 돼갔다.

출근 못 한 나를 찾아 후배들이 집에 오는 일이 잦아졌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월급 절반을 생명보험, 종신보험에 들었다. 그리고 계속 술을 마셨다. 나는 삶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비가 날아왔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

나비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세상에 없다.

나비는 은인이다.




15년 전의 나에게 잘했다고 토닥여주고 싶은 게 있다.

인생에서 가장 깊고 어두웠던 동굴에 빠졌던 그 순간. 난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라는 한가닥 끈을 놓지는 않았다. 아이가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아빠엄마 두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악착같이 경제력을 키웠다. 고맙게도 아이는 너무 잘 커주었고 지금은 넓은 세상을 날아가고 있다.


참. 미안한 것도 하나 있다. 내 몸에게.

술담배 중독, 폭식, 일중독, 수면부족, 고도비만... 어느 날 갑자기 살이 빠져 병원에 갔다. 혈당이 450을 넘었다. 그렇게 난 당뇨인이 됐다. 온 가족 중 유일하게.


인생이란 놈은 만만하지 않다.

살다 보면 깊은 수렁에 빠질 때가 분명히 있다. 무기력, 패배감에 지배당하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희망 한가닥은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뭐든, 한 가지만 있으면 또 살아가는 힘을 낼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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