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대디와 미스, 재혼가정 연대기<5>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었다. 어머니가 OO애미와 통화했다고 이야기하셨다.
"네?" 잘 못 들었나 했다. 이혼 후 아이를 안 찾은 지 4년이 넘은 전처는 집에서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인 모양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중학교는 여기 시골에서 다니는 거보다 서울에서 다녀야지, 학원도 가고 공부도 잘하려면 말이야"
어머니는 예전부터 자식들 공부가 아주 중요한 분이셨고 '손자=자식'이었다.
"OO애미와 통화하니 데리고 있겠다고 하네. 다행히 애도 서울에서 엄마와 지내보겠다고 하고"
"아니, 어떻게 거기로 애를 보내요? 그러면 내가 데리고 있을게요"
"결혼도 안 하고 동거 중인 니가 어떻게?"
"니가 키울 거면 걔랑 헤어지고 혼자 키워"
어머니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질 자신은 없었다.
거의 4년 만에 전처를 만났다. 전처의 얼굴은 완전 딴 사람이 돼 있었다. 성형수술을 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본론을 바로 이야기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결혼하면 애를 데리고 올 거야. 내가 다시 애를 데리고 가는데 동의해?"
전처는 동의했고 그렇게 우리 아이의 엄마(전처)와의 서울 생활은 시작됐다.
아빠로 미안한 마음이 많았기에 주말에 애와 가능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서울랜드도 도서관도 가고 맛집을 찾아다녔다. 아이는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애가 잘 지내는 걸 보니 엄마는 엄마구나' 다행이었다.
문제는 반년 정도 지나서부터다.
'아이와 같이 있는 게 힘들다'라는 전처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그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빨리 결혼하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우리집은 물론 여자친구 집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이 깊어가는 시기였다.
"집에 경찰이 왔어"
어느 날 밤늦게 전처에게 전화가 왔다. 놀라서 애를 보러 달려갔다. 처음으로 전처집에 들어갔는데 집안이 난장판이었다. 상황인즉슨 '아이가 엄마 목을 졸라서 경찰을 불렀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착하기만 한 아이였다. 나와 할머니, 고모, 사촌들과도 잘 지냈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었다.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이는 많이 놀랐듯 했다. 조심스레 말을 걸었지만 말을 안했다. 이상하게 풀이 죽어 있었다.
전처는 자기가 데리고 있으면 '사고'가 날 것 같다고 애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사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문에서나 보던 안 좋은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아이를 전처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께 다시 보낼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럼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지. 결혼을 생각할 때부터 아이와 한가족이 될 생각을 했는데 뭐. 그 시기가 빨리 온 거밖에 달라진 게 없어. 준비할게 많겠다" 그녀는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많은 짐을 지워서 미안했지만 그 당시엔 그녀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우리 부자의 천사였다.
아이가 오기 전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 ㄷ자 엄청 큰 소파와 큰 침대.
새 가족이 아직 불편했을 아이가 혼자 있을 수 있게 방은 '편한 아지트'로 만들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거실에 나오게 하기 위해 TV앞에 3면에 한 명씩 누울 수 있는 큰 소파를 놓았다. 그리고 강아지 2마리가 있었는데 아이가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12년 전, 우리 새 가족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31살의 아가씨가 남자 중학생의 학부모가 됐다. 아내는 엄마 경험이 없었고 아이는 의심과 상처가 가득했다.
아내와 아이의 나이는 겨우 17살 차이였다. 덩치가 큰 아이와 아내가 걸어가면 여자친구로 보였다. 그 당시 아이는 아내를 '이모'라 불렀다. 거기다 나이 많은 내가 끼면 조합은 더 이상했다. 우리 가족 3명의 그림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지금은 아이가 엄마가 젊어서 말이 잘 통한다고 좋아한다. 아빠는 늙어서 답답하다며.
아들이 나보다 엄마와 더 친한 우리 가족이 참 좋다.
나중에 알았다. 왜 아이가 엄마(전처)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처는 교육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혼 후 아이 비양육'은 아킬레스건이었던 듯하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좋은 옷을 입혀서 아이가 데리고 다녔고 '좋은 엄마'임을 드러냈다. 그 외 시간은 방치됐고 아이는 게임에 빠졌다. 아이는 엄마(전처)가 자기를 이용한다는 걸 느꼈던 듯하다. 아이는 엄마말을 안 듣게 됐고 엄마는 폭력을 썼으며 힘이 세진 아이도 폭력이 튀어나왔다.
시간이 꽤 지나고 아이와 그날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잘못했음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안 좋았던 시기였다고.
아이에게 참 미안하다. 그 당시 나는 많이 '미성숙'했었다. 준비되지 않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가정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 무엇보다도 아이를 안정적인 환경에서 돌보지 못했다.
지금은 너무 잘 커준 아들에게, 미성숙이었던 아빠가 사과한다. 그리고 고맙다.
나는 '나이에 맞는 성숙함'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아픈 과거지만 기억을 곱씹고 반성하면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