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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주인 May 12. 2024

재혼가정에서 일어나는 일-②생활편

싱글대디와 미스, 재혼가정 연대기<7>

의심과 상처가 가득한 중학생 사내아이.

엄마 경험이 없었던 31살의 아가씨.

그리고 나.

갑작스러운 동거가 시작됐다


※ 동거 배경은 앞글 참고 : 누가 봐도 이상한 가족의 시작


"자, 이제 우린 오늘부터  한가족이야"
이보다 더 모순적일 수 있나?


일반 가정에서 당연한 것들이 입안의 생선가시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 이 상황은 꽤 오래 지속됐고 가시를 뱉지도 삼키기도 애매한 상황이 특히 힘들었다. 재혼가정을 먼저 살아본 경험자로서 앞으로 이 길을 가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우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공유한다.


<재혼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①첫날, ②생활 편, ③호칭 편, ④관계 편, ⑤번외 편으로 나눠 정리한다.       


재혼가정에서 일어나는 일-②생활 편



할머니가 너무 '귀하게' 키운 아이


퇴근이 늦었다. 또 저녁 식사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저녁이 있는 대한민국은 역시 쉽지 않다.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휴우~' 한숨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최근 이런 기운을 자주 느낀 듯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가씨가 큰 남자아이를 케어하는 게 쉽지 않다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걱정만 되고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되기에 아들이 방에 들어간 틈을 타 와이프를 슬쩍 떠봤다.


"요즘 어때? 괜히 나 만나서 당신이 고생이네. 미안해"


설거지하던 아내가 물을 잠그고 돌아봤다.

"아니, 힘든 건 아닌데 밥을 해도 신이 안 나"


"...?" 

요리를 좋아하는 아내였기에 이 말이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아내가 피곤한 거 같아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다음날 만사제처 두고 칼퇴근해 저녁을 함께 했다. 밥 먹는 아들을 보고 아내가 왜 그러는지 바로 알았다.

아내가 요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밥공기는 반 넘게 남아 있었고 반찬도 거의 그대로였다. 


아이에게 '왜 이모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라고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감이 왔다.

나의 어머니는  매 끼니마다 따뜻하게 밥과 국, 찌개, 반찬을 새로 하는 '자식에게 진심'인 분이시다. 안 먹으면 어떻게든 더 먹이려고 따라다니면서 입에 넣어 줬고, 아이가 좋아하는 햄, 소시지는 항상 식탁에 올랐다.  

특히 지방분이라 짜고 달고 간이 무척 셌다. (나중에 서울생활을 하면서 알았다). 손자 사랑이 넘치고 넘치는 할머니 스타일에 익숙해진 아이는 아내 스타일의 밥상이 당기지 않았던 듯하다. 


아이는 깔짝깔짝 음식에 손 만 대고 일어나고, 조심스러운 아내는 '잔소리'도 못하고 속 만 태우고 있는 거였다. 중학교 1학년이면 눈치가 있을 법도 한데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의 아들은 그런 게 없었다. 그냥 반찬투정 하는 덩치 큰 아이였다. 


아내가 이 상황을 좀 더 힘들어하는 이유도 있었다. 아내는 가공식품 쓰지 않고 음식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만드는 스타일이다. 특히 아이와 친해지려고 음식에 더 힘을 줬던 거 같다. 그렇게 정성껏 만드는데 다 남기니 힘이 빠질 만도 했다.


"너무 잘하려고 안 해도 돼. 우선 아이가 잘 먹는 스팸, 냉동식품도 좀 하고 안 먹으면 냉장고 넣었다가 다시 줘도 되지 않을까? 요즘 학교 급식도 잘 나오니까 배 고프면 알아서 먹을 거야. 건강한 요리는 나중에 천천히 먹이면 될 거야"


"난 식사 시간은 그냥 즐거운 시간이었으면 좋겠어. 아이랑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당신이 아이와 친해질 수 있는 그런 시간"


아내도 동의했고 우리는 식사시간을 '먹는 행위' 보다 '친해지는 도구'로 활용하기로 했다. 아이가 관심이 있을 만한걸 물어보고 이야기하다 보니 대면대면했던 관계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한창 멋 부릴 나이가 된 아들과 패션 디자이너 출신 아내는 다행히 공통관심사가 잘 맞았다. 주말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참, 아내도 아들의 '불량한 입맛'을 다 맞춰준 건 아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듯이 건강식으로 길들이는 고급 스킬을 발휘했다. 지금은 명절에 내려가면 할머니 요리보다 엄마 요리가 더 맛있다고 한다.



'청소광' 아내와 '청소무개념' 아들


나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정말 많은 사랑을 주셨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입안의 혀처럼 아이에게 모든 걸 맞추었다. 매일 아이방 청소를 하고 따라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하셨다. 아이는 정리정돈을 배우지 못했고 화장실 위생도 불결했다.


문제는 우리 집 화장실이 한 개라는 거다.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방청소야 아내가 눈을 감아버리면 되겠지만 공용공간인 화장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사방에 튄 자국을 보여주고 여기에 앉아야 되는 아내의 기분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부탁했다. '소변 후 1분 이상 샤워기로 물 뿌리기, 변기커버 세워놓기'. 한 번에 개선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앉아서 소변을 보게 할 수도 없었다. 

 

아들 화장실 사용 후 내가 확인하고 화장실 청소를 자주 했다. 이때 락스를 엄청 뿌렸던 기억이 있다. 이건 사실 나에게도 스트레스였다. 혹시라도 재혼가정을 시작하게 된다면 화장실 2개는 꼭 추천한다


방청소 이야기를 건너뛸 뻔했다. 

우리는 아이에게 주 단위 용돈을 주고 있었다. '아들과 1주일에 한번, 주말에 청소 후 용돈 지급' 하는 걸로 타협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는 청소를 했다는데 우리 눈에는 청소를 안 한 걸로 보였다는 것이다. 용돈을 안 주고 다시 청소를 시켰는데, 아이 기분만 상하고 효과가 좋지 않았다. 우린 '고집' 하지 않고 아이가 청소한다는 의미만 뒀다. 나중에 누군가의 남편이 되면 아내가 고쳐주리라 믿는다. 



아내와 아이, 둘만 남겨놓고 해외출장을 가도 될까? 


아이가 집에 온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원래 1년에 열 번 이상 해외 출장을 가는 직업인데 출장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 둘만 남겨놓고 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려다가 반년쯤 되는 시점에 꼭 가야 하는 출장이 생겼다. 특히 주말이 낀 출장이었다.


'둘만 놓고 가도 될까? 아님 어머니한테 와달라고 부탁할까?'

고민고민 하다가 아내에게 털어놨다. 아내는 '한번 있는 출장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일 텐데 그럴 때마다 어머님이 오실 수도 없고, 또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 부담스럽지 않겠나' 라며 둘이 잘 있어 보겠다고 했다.


출장 내내 신경 쓰였지만 별일 없이 지나갔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생각이 들 만큼. 아마 그 당시 내 머리는 온갖 걱정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던 듯하다. 일요일 오전, 집으로 피자를 보냈다. 아내는 아들과 피자 먹으면서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보내줬다. 그때부터 출장걱정은 하지 않았다.


재혼가정에서는 한 단계 넘어서야 될 때가 있다. 첫 출장 때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더라며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못했을 거다. 서로를 믿고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 외에도 아침 기상, 핸드폰 사용, 게임, 용돈, 학원 등 무수히 많은 '사소한 문제'가 일어났다. 내 배로 놓은 자식과도 티격태격인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다 합쳐진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는가?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안 좋은 방법은 '상황 탓'과 '회피'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약 '재혼가족이라 어쩔 수 없어'라고 상황 탓을 하거나, '혹시 상처받으면 어떡하지?'라고 피하기만 했다면 '사소한 문제'는 반복되면서 큰 문제로 커졌을 거다.  


새 차를 사면 스크래치 날까 겁난다. 그렇다고 지하주차장에 세워둘 수만은 없지 않나?

그럼에도 우리는 새 차를 몰고 나가야 한다. 혹 스크래치가 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인생에도 스크래치가 날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번 상처받은 재혼가정은 스크래치를 피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강할 수 있다. 재혼가정이란 특수성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다.


우리가 꼭 재혼가정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가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생기고 또 새살이 돋고, 이런 스크래치가 시간이 지나면 고목의 나이테 같은 멋진 무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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